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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덕규 시인 / 기러기 남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5.

박덕규 시인 / 기러기 남매

 

 

먼 훗날

먼 머언 훗날

나는 이 별에서

너는 또다른 별에서

 

날아 가는 철새

저 기러기떼 행로를 따라

기러기발에 편지를 묶어

 

먼 옛날처럼

먼 머언 옛날처럼

우리는 이 땅

우리는 저 땅

 

기러기떼 기러기발

봄이 오면 하늘을 보면

보았는가 아아 대답 없는가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 / 깊은 산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도 깊은 산

깊은 산에 살고 계실까

깊은 산 깊은 산엔 여름이 와도

눈이 녹지 않는다는데 깊은 산

골골마다 지나온 바람결에

아버지 기침 소리 실리어 있나

 

아버지는 깊은 산 왜

깊은 산에 숨어 버리셨나

옛날 그 누구에게 모함을 당해

이리저리 유배지로 끌려다니다

뿌리치고 산으로 달아나신 후에

혹자는 산적 두목이 되었다 하고

혹자는 산신령이 되었다 하는데

혹자는 잊고 혹자는 비겁자라고

 

산불을 질러도 산사태가 나도록

아버지는 깊은 산 그 어디실까

아버지 깊은 산은 변함도 없이

깊은 나무 깊은 말씀 심고 계실까

세상이 바뀌고 솔 숲이 우거져도

아버지 깊은 세월 꽃 필 수 있을까

아버지 깊은 산 바다 되지 않을까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 / 나이테

 

 

나무의 나이테는

가뭄이 심하거나 추위가 혹독한 날에는

테와 테 사이가 촘촘해진다.

햇빛과 수분이 적당한 시기에는

테 간격도 그만큼 넓어진다.

 

내 몸 안에서 촘촘하게 원을 그리던 나이테가

날이 갈수록 널널해지는 듯하니

이즈음 내가 제법 호시절이 아닌가 싶다.

 

이 사이가 벌어져 말할 때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도

뱃살 불어 펑퍼짐한 민둥산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숨 가쁘게 오르던 산 중턱쯤

너럭바위 아닌 바윗장 같은 거라도 깔고 앉았다가

산 그림자가 숲을 간질이며 지나가는 걸 보곤 한다.

날아가는 새들의 표정이 보일 때도 있다.

 

겨울이 오면 나무들은

잔가지 사이에 감추어 왔던 둥지를 드러낸다.

안개와 미세먼지에 휩싸인 도시도

나지막한 것들이 사방에서 윤곽을 잡아

 

아직은 너끈한 풍경이 된다.

 

나를 머물게 하느라

욕설과 싸움으로 거칠어진 내 몸은 이제

무딘 짐승처럼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동심원처럼 퍼져가는 그 물결 위에 누워

나는 하늘에서 구름이 하는 놀이를 보곤 한다.

 

 


 

박덕규 시인(소설가)

1958년, 경북 안동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0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아름다운 사냥>, <골목을 나는 나비> 등. 2005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2014.1 한국문예창작아카데미 회장. 1982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 1982 중앙일보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 1992 편운문학상 수상. 2001 제14회 경희문학상 소설부문 수상. 2015.5 제30화 이상화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