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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시인 / 봄이 오는 길
얼음 풀린 강을 끼고 앓고 난 누님을 모시고……
이 두 가지를 겸하면 아리아리 저승도 가까운가.
아득한 강 건너 마을엔 복사꽃도 피어나는지
시방 잉잉거리는 벌떼소리 아지랑이 흐르고
산(山)이마엔 눈녹는 기척 보얗게 안개 서리고
나는 차마 손짓할 수 없다 봄이 오는 완연한 저 길을.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박재삼 시인 / 부부(夫婦)바위
남해안(南海岸) 어디쯤이던가 부부(夫婦)바위가 마주보며 살아오고 있었다. 어느 핸가는 아내바위가 얼굴에 가득 진달래를 피우더니 곁들여 부끄러움도 타면서 어느새 저쪽 건너의 다른 숫바위에 대하여 눈짓을 주고 고개를 돌리는 것 같더니, 그래서 남편바위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달래는 것 같더니, (이럴 때도 그 부부바위가 내 마음엔 예쁘게 비쳐 왔다) 상당한 세월이 지나자 이제는 그런 일이 없었던 듯 조용히 다시 마주보며 주름진 얼굴로 살아오고 있다. (이럴 때도 그 부부바위는 역시 내 마음엔 아름답게 비쳐 왔다)
대관령 근처, 정음사, 1985
박재삼 시인 / 비 듣는 가을나무
슬픔 많은 우리의 마음의 키들이 비로소 가지런해지는고나, 들앉은 사람들아.
넘치는 몸살이 아니라 염병(染病)이 아니라 적당한 하늘의 가을나무 키만한 데서 우리의 수심은 소리지는데……
돌팔매의 돌이었던 그런 돌들도 우리의 팔을 늘인 그늘에서 호젓이 비젖는 것을,
이젠 얼마 안 남은 이파리같이 우리의 얼마 안 남은 그 남은 것을 헤아려 보면 말라가는 눈물도 알아 보겠네.
비듣는 가을나무, 동화출판공사, 1981
박재삼 시인 / 사람이 사는 길 밑에
겨울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길 바다 밑에 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다 그런 일이라!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
박재삼 시인 / 산에 가면
산에 가면 우거진 나무와 풀의 후덥지근한 냄새, 혼령도 눈도 코도 없는 것의 흙냄새까지 서린 아, 여기다, 하고 눕고 싶은 목숨의 골짜기 냄새,
한동안을 거기서 내 몸을 쉬다가 오면 쉬던 그 때는 없던 내 정신이 비로소 풀빛을 띠면서 나뭇잎 반짝거림을 띠면서 내 몸 전체에서 정신의 그릇을 넘는 후덥지근한 냄새를 내게 한다.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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