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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일 시인 / 굼벵이
뒤안길에서 한 5천년 살아온 우리들은 낮도 그리워하고 밤도 함께 그리워하는가.
그래서 그런가 지금 내가 뒹구는 땅 위에는 낮도 많고 밤도 많아라
하룻밤을 썩은 이엉 속에서 살다가 햇빛 쨍쨍한 마당으로 내려와서 눈도 코도 입도 귀도 닫힌 채
허연 몸을 번쩍번쩍 뒤집고 뒤집어서 몸에 묻은 밤이슬을 그리움으로 말리다가 이내 몸을 꾸부리고 침묵하는……
누가 나더러 굼벵이라고만 하는가 밤마다 썩은 이엉 속으로 기어 들어 이젠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열어 놓고
드드득 이빨 갈아 어둠을 갉아 먹고 눈깔 껌벅여 어둠을 갉아 먹고 그리워서 하도 그리워서 달더러 보라고 몸 뒤채이며 밤이슬 맞는다. 밤이슬 맞는다.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조태일 시인 / 길
그냥 가렵니다. 황톳길이건 돌밭길이건 잠 못 이루고 서로 앉아 몸 비비며 깨어 있는 풀밭길이라도 어쩌겠소, 어쩌겠소.
그냥 떠나렵니다. 마음 편하건 안 편하건 오늘 밤도 저리 잠 못 이루고 깨어서 반짝이는 별밭길이라도 어쩌겠소, 어쩌겠소.
책들도 노트도 불태워 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으로 그 기분으로 그 첫울음으로 가렵니다, 떠나렵니다. 말리겠소? 말리겠소?
청청히 솟아 있는 대밭이건 묵묵히 앉아 있는 바윗길이건 철철이 흐르고 있는 강물길이건
어쩔 수 없지 않소 헛말만 떠도는 이곳보다야 훨씬 살아갈 맛이 나지 않겠소? 걸어서 걸어서 잠 이룰 때까지 뜬눈으로.
산속에서 꽃속에서, 창작과비평사, 1991
조태일 시인 / 깨알들
응달진 미곡상회의 가장 구석진 자리로 밀리고 밀려 무슨 사연들로 저리 웅성이는가.
버러지 같은 것 버러지 같은 것들이 제 세상 만난 듯 슬슬 치며 기어 다녀도 꼼짝 않고 물러앉아 곱디곱게 길을 내주며,
눈보라치는 날이든 장마가 끊이지 않는 날이든 작은 몸들을 서로 부둥켜안고 지는 해 뜨는 달 가슴으로 받아 반짝이며
무슨 소문은 없나 꿈이라도 좋겠네
빨리 팔려가고파서 눈들을 굴리며
지나는 행인 쳐다보며 목을 빼네
그리워서. 그리워서.
가거도, 창작과비평사, 1983
조태일 시인 / 난들 어쩌란 말이냐
오늘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4․19정신! 어쩌고저쩌고 하면 실감도 안 나고 괜히 부끄러워만 진다.
그날 우거진 총검의 숲을 맨가슴으로 헤치며 독재의 울타리를 향해 파도치다가 한 방의 총알에 쓰러져 오늘 다시 살아난다 해도 부끄러울 것인가.
그날 총알이 나를 피해 달아나서 그날 숨을 거두지 못했지만 그 총알이 한없이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맺힌 한은 여직 남아 있어서 들끓는 눈물을 하늘에 뿌리며 비틀비틀 수유리를 찾아간다. 하, 허연 비석들이 살아나면 무얼하나 하, 들꽃들이 피어나면 무얼하나 하, 참새들이 울어싸면 무얼하나 하, 혁명을 생각하면 무얼하나
4․19 묘지 앞에 비석으로 꼿꼿이 서서 뼈를 갈아 섞은 듯 독한 소주에 나를 묻으면 하늘도 언짢아서 궂어진다. 궂은 대로 번개도 치고 천둥도 울면야 그날의 함성을 몸에 두리두리 두르고 피뢰침일랑 머리에 꽂고 가슴에 꽂고 죽음 가까운 데까지 가서 묶여진 육신 펄럭이며 아가릴 벌려 풍선처럼 아우성 아우성을 친다면 덜이나 억울하겠는데……
하, 하늘은 저리 궂기만 하고 천년이고 만년이고 바다는 파도 하나 못 일으킬 징조냐. 더운 가슴들은 식어만 가기냐 살아남아서 괜히 부끄러워진다.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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