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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재삼 시인 / 바람 그림자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4.

박재삼 시인 / 바람 그림자를

 

 

어지간히 구성진 노래끝에도 눈물나지 않던 것이 문득 머언 들판을 서성이는 구름그림자에 눈물져 올 줄이야.

 

사람들아 사람들아,

 

우리 마음 그림자는, 드디어 마음에도 등을 넘어 내려오는 눈물이 아니란 말가.

 

―문득 이도령(李道令)이 돌아오자, 참 가당찮은 세월을 밀어버리어, 천지(天地)에 넘치는 바람의 화안한 그림자를 춘향(春香)은 눈물 속에 아로새겨 보았을 줄이야.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바람 앞에서

 

 

지난 겨울에는

발을 굴르는 섭섭함을 외면하고

바람은 친구를 안고

땅밑으로 땅밑으로 기어들더니

 

이제는 따로

새 정신이 들었는지

할미꽃 모가지를 타고 올라와

목숨이 좋다고

목숨 있는 것 근처에서만

희희낙락(喜喜樂樂)하는고나.

 

바람아 바람아

네 앞에서 나는 늘

앞이 캄캄해진다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

 

 


 

 

박재삼 시인 / 밤 바다에서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질정(質定)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天下)에 많은 할말이, 천상(天上)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병후(病後)에

 

 

봄이 오는도다.

풀어버린 머리로다.

달래나물처럼 헹구어지는

쌍긋한 뒷맛

이제 피는 좀 식어

제자리 제대로 돌 것이로다.

 

눈여겨 볼 것이로다, 촉트는 풀잎,

가려운 흙살이 터지면서

약간은 아픈 기(氣)도 있으면서

아, 그러면서 기쁘면서……

모든 살아 있는 것이

형(兄)뻘로 보이는 넉넉함이로다.

 

땅에는 목숨뿌리를 박고

햇빛에 바람에

쉬다가 놀다가

하늘에는 솟으려는

가장 크면서 가장 작으면서

천지여!

어쩔 수 어쩔 수 없는

찬란한 몸짓이로다.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박재삼 시인 / 봄바다에서

 

 

1

 

화안한 꽃밭같네 참.

눈이 부시어, 저것은 꽃핀 것가 꽃진 것가 여겼더니, 피는 것 지는 것을 같이한 그러한 꽃밭의 저것은 저승살이가 아닌 것가 참.  실로 언짢달 것가 기쁘달 것가.

 

거기 정신없이 앉았는 섬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살았닥해도 그 많은 때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숨소리를 나누고 있는 반짝이는 봄바다와도 같은 저승 어디쯤에 호젓이 밀린 섬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가.

 

2

 

우리가 소시(少時)적에, 우리까지를 사랑한 남평문씨부인(南平文氏夫人)은, 그러나 사랑하는 아무도 없어 한낮의 꽃밭 속에 치마를 쓰고 찬란한 목숨을 풀어헤쳤더란다.

 

확실(確實)히 그때로부터였던가, 그 둘러썼던 비단치마를 새로 풀며 우리에게까지도 설레는 물결이라면,

우리는 치마 안자락으로 코훔쳐 주던 때의 머언 향내 속으로 살딸ㅎ아 마음딸ㅎ아 젖는단 것가.

 

3

 

돛단배 두엇, 해동갑하여 그 참 흰나비같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朴在森. 1933년-1997년) 시인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1996 제4회 한국공간시인상 심사위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