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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민 시인 / 거미의 밤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3.

허민 시인 / 거미의 밤

 

 

남겨진 거미줄이 미세하게 타오르던 연기처럼 그대로 굳어버린 그을음의 밤...밤

 

모두 빠져나간 자리 미처 사라지지 못하고 한때 활활 불 타올랐던 시간이 있었다는 듯

찢어진 그물만 남겨놓은 채 잔혹한 거미가 떠나버린 밤...그 밤

 

한때 우리가 있었다는 사실만 써 놓은 어느 반조명의 카페 텅 빈 구석 흘림체의 낙서처럼

커다란 절지동물로 서로를 무섭게 삼키던, 잔인하고 징그럽던 시절은 재가 되어 흩날려간 밤...밤

 

연기의 머리카락 같은, 흰 실타래만이 조금씩 풀려 나오는 이 좁은 방안은 너의

이제는 낡아진 헌 옷 같아서

우리는 이제 아주 가끔씩 그 헌 옷을 벗지만,

빛바랜 음모(陰毛)들은 서로의 비밀을 가두지 못하는 밤...오늘 밤

 

그렇다해도 남겨진 거미줄은 다른 이유가...내가 아무 쓸모도 없는 이 글을 남기고 있듯이

 

거울을 볼 때마다 주름진 그물만이 얼굴에 가득하고

나와 너를 스쳐간 한 때의 표정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모르게 떠돌고 있는, 허공의 오랜 거미줄 그 행간의 캄캄함을 읽는 밤

 

소멸과 탄생을 반복하며 서로에게 흰 직선을 내리긋던 밤하늘 별자리들을 떠올리는

밤의 밤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또 뭔가 흔적도 없이 녹아내릴

극세사의 시간들을 바닥에, 밤하늘에 새기고 있는

끝나지 않는 밤, 이 밤

 

계간 『시와 사상』 2019년 겨울호 발표

 

 


 

허민 시인

1983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 웹진 《시인광장》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