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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시인 / 거미의 밤
남겨진 거미줄이 미세하게 타오르던 연기처럼 그대로 굳어버린 그을음의 밤...밤
모두 빠져나간 자리 미처 사라지지 못하고 한때 활활 불 타올랐던 시간이 있었다는 듯 찢어진 그물만 남겨놓은 채 잔혹한 거미가 떠나버린 밤...그 밤
한때 우리가 있었다는 사실만 써 놓은 어느 반조명의 카페 텅 빈 구석 흘림체의 낙서처럼 커다란 절지동물로 서로를 무섭게 삼키던, 잔인하고 징그럽던 시절은 재가 되어 흩날려간 밤...밤
연기의 머리카락 같은, 흰 실타래만이 조금씩 풀려 나오는 이 좁은 방안은 너의 이제는 낡아진 헌 옷 같아서 우리는 이제 아주 가끔씩 그 헌 옷을 벗지만, 빛바랜 음모(陰毛)들은 서로의 비밀을 가두지 못하는 밤...오늘 밤
그렇다해도 남겨진 거미줄은 다른 이유가...내가 아무 쓸모도 없는 이 글을 남기고 있듯이
거울을 볼 때마다 주름진 그물만이 얼굴에 가득하고 나와 너를 스쳐간 한 때의 표정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모르게 떠돌고 있는, 허공의 오랜 거미줄 그 행간의 캄캄함을 읽는 밤
소멸과 탄생을 반복하며 서로에게 흰 직선을 내리긋던 밤하늘 별자리들을 떠올리는 밤의 밤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또 뭔가 흔적도 없이 녹아내릴 극세사의 시간들을 바닥에, 밤하늘에 새기고 있는 끝나지 않는 밤, 이 밤
계간 『시와 사상』 2019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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