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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려원 시인 / 꽁치뼈를 발라내는 3인칭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3.

김려원 시인 / 꽁치뼈를 발라내는 3인칭

 

 

사다리는 어떤 종류의 생선이었을까

꽁치 한 마리 속에 사다리 하나 눕혀져 있네

접시에 담긴다는 건

누구나 알 만한 종류와 품평이라는 것

 

그러나 입속은 가치를 따지지 않는

또 다른 주머니 같은 것

 

살 밖의 장식,

잘 구워진 생선 위 한 조각 레몬 같은

그러나 사다리에 오르려 하는 건

오름과 내림을 깨우친 다음에나 가능한 일

꽁치 한 마리의 속마음이 펼쳐놓은

생선살은 참 가지런한 좌우의 영역이고

물속을 휘젓는 일로 편 갈라져

물 밖을 익힌 탓이려니

 

발라낸 뼈에는 두 번 다시 살 붙지 않겠지만

흩어진 살을 떠난 사다리 양쪽에

분명한 오름과 내림의 흔적들

누구나 꿀꺽,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꿈틀, 물 밖의 한때를 접시에 쓰다가

아픈 뼈 가만히 말리고 있는

 

계간 『애지』 2018년 겨울호 발표

 

 


 

 

김려원 시인 / 견딤의 자세

 

 

나는 지금도 45도 각도로 운다.

가끔의 꿈들도 한쪽 발로 견디면서 꾼다.

가장 멀리 나를 보내려다 비틀린 배웅

맨발로 내달린 장면에서 파릇한 봄밤을 데고 말았다.

가능한 자세란 불가능한 어린이를 불러내는 일

기억으로 태어나 늙지도 않은 아이가

벚나무 아래에 부러져 드러눕고

나는 아이의 늙은이로 서 있다.

명자나무는 저린 다리 하나로

스쳐가는 숱한 발가락을 상상한다.

더운 바람 쪽으로 신발을 신었다 벗었다 한다.

예절을 배운 적 없는 가면의 붉은 낯들이

꽃자리를 어지럽힌다고

봄만 되면 벚꽃을 비웃고 명자꽃을 일러바친다.

 

쌓인 표정을 차마 밟지 못해서 한쪽 발이 뒷걸음질로 넘어지고 넘어진 각도로 나는 또 운다.

 

없는 꼬리뼈를 부추겨

가장 멀리 나를 다시 보내려는데

꿈 밖에 누군가 대각선으로 서 있다.

혼자 걷던 어느 밤의 내 그림자와 많이 닮았다.

45도의 각도로

넘치지도 고이지도 않는 각도로 서 있다.

 

계간『푸른사상』 2018년 봄호 발표

 

 


 

 

김려원 시인 / 처음처럼 대작(對酌)

 

 

입술 한 번 댄 적 없는 처음처럼

소주잔이 네 턱 아래 놓여 있다.

너도 끝이고 나도 끝이다 싶어

내 입술에만 댄 소주잔

처음처럼 소주잔은 소주병이 처음처럼 비어갈수록

빛난다, 내가 사준 브로치의 가슴같이

 

브로치 대롱거리는 네 왼쪽에 기댄 적 있다.

그 밤 내 왼쪽 쿵쾅거림도 들었다.

사실이었을까, 술잔을 꽝 내려놓을 때

 

우리가 돌아다닌 수월리 함박리 구라리

소주리 연탄리 파전리 주정리 외치리 설마리 망치리의

밤과 밤의 노래에 대하여

사실이었을까, 술잔을 다시 꽝 내려놓으며

 

너와 내가 오늘밤이 끝이어도

끝이 아닌 것처럼 소주잔을 채워들고

“여기, 파전”을 외친다 입술에서 테이블이 망가지도록

 

처음처럼 소주잔에 까마귀가 날고 있다.

 

변방 동인지 제34집 『얼룩무늬 손톱』 2019년 수록

 

 


 

김려원 시인

2017년 《진주가을문예》 당선으로 등단. 현재 〈변방〉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