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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원 시인 / 고요한 격렬
비가 내린다 이때 잔잔한 강의 수면은 앞 다투어 과녁이 된다 무수한 꽃으로 피어나는 과녁 숨을 멎고 일체의 몰입으로 입수하는 흐린 활대는 화살을 흩뿌렸겠지만 집중 없이 불어나는 순간의 과녁들
깃털달린 살이 무수히 박힌 저수지의 가을 거꾸로 꽂힌 갈대들마다 소리가 바람을 도열하며 서 있다 흔들리는 은빛 겨울을 달고서 오래 된 상처가 병상의 꽃이되 듯 이른 봄에 박힌 쓸쓸함이 자라 갈대밭을 이루고 있다
속을 비우는 갈대일지라도 부러지거나 쓰러지지 않는 중심 있는 살로 활활 부대끼다가 고요한 격렬 이었다가 빗줄기들을 명백하게 다 쏟아내는 베이는 이파리는 흉기의 습관이다
계간 『시와 문화』 2019년 겨울호 발표
이여원 시인 / 창세기
몇 벌의 바람 옷을 갈아입고 담장의 설계도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탱자나무 가시 길다란 담장을 주문받고 바느질이 한창이다
이파리들 이어 붙이는 저 바늘 끝
뾰족하게 끝으로만 몰려가는 따끔거리는 방향과 쓰고 남은 바늘들이 엉켜 있고 바늘 위로 바늘이 솟구치며 찌르니 흰 꽃 따던 손 맵시가 낱장으로 떨어진다
안쪽이나 바깥이나 일색(一色)이어서 숭숭 드나드는 바람은 제 얼굴을 잊어버리기도 일쑤다 옹골진 내력도 없고 안으로만 삭여야 하는 비밀도 없는 가시 담장
담을 깁는 유전자, 종족을 먼저 알아보고 가시들이 달라붙어 엉키어 간다
문을 열자 순(筍)끝으로 창세기가 펼쳐진다 가시의 유치(乳齒)는 무늬만 닮은 초록의 식물성, 그 기세를 꺾으려는 듯 여릿여릿 내리는 비 빗방울을 이어 붙여 장마에 든다 연두색 부피가 부풀어 오르고 박새, 참새, 오목눈이, 굴뚝새들이 들락거리며 둥지에 기둥을 세운다
밖도 안도 없는 담장이 하는 일은 몇 걸음 더 늘려 문을 만들고 지나가는 헛기침 두어 번을 소리 내어 내뱉는 일 시고 떫은 실밥들로 담은 쌉쌀해져간다
담장을 똑똑 따다가 술을 담그면 세상의 모든 실밥들이 풀리어 간다
시집 『빨강』(현대시, 2019) 중에서
이여원 시인 / 난청
나뭇가지와 흙바닥이 없었다면 문맹률은 한 참 더 올라갔을 것이다
봄이었고 중이염을 앓고 있었다 군대에 간 오빠가 귀를 잃은 편지를 보내왔다 오빠의 전사 위로금으로 귓속 가득 쌓인 난청을 들어냈으나 나는 한 쪽이 꽉 막힌 사람이 되었다
목련나무들마다 하얀 붕대를 풀고 있었고 한 쪽의 실음失音을 얻었다
들리지도 않으면서, 어지러운 방향만 들어 있는 귀 커튼을 닫은 귀 소음들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있었다 귀를 닮은 꽃들, 소리가 없는 봄이 지나갔다 껍질만 남은 귀에 어둠이 팔짱을 낀 채 옆에서 걸었다 지금도 뒤에서 부르는 소리는 방향이 없다
나의 문자는 흙바닥과 나뭇가지에서 나왔으므로 쉽게 지워지고 쉽게 부러졌다 시든 귀들이 뚝뚝 떨어진 목련 밑 흰 목련꽃을 열고 달팽이관을 꺼내 갖고 놀았다
들리지 않은 귀에는 오빠가 들어 있고 오빠가 작곡한 악보에는 한 쪽의 귀가 없었다 나뭇가지에서 나온 낙서를 쓱쓱 문지르고 가는 흔들리는 그늘 슬픔에게 배운 글자에겐 홑받침이 많다
시집 『빨강』(현대시, 201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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