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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인 / 호수와 나무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와 귀는 접고 눈은 뜨고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개 한 마리 물가에 앉아 있다
사내는 턱을 허공에 박고 개는 사내의 그림자에 코를 박고
건너편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는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오규원 시인 / 환상(幻想)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왕자(王子)가 사는 나라에는 언제나 장난감 칼이 필요하고 왕자(王子)가 사는 나라에는 언제나 예쁜 공주(公主)가 필요하다. 왕자(王子)가 사는 나라에는 언제나 착한 백성들이 필요하고 왕자(王子)는 반드시 어릴 필요가 있다.
왕자(王子)는 왕(王)의 아들 부왕(父王)이 죽을 때까지 어릴 필요가 있다. 왕자(王子)가 아닌 아이들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어리지 않아도 되고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어도 된다는 것을 동화책을 읽으며 나는 깨닫는다.
이기(利己)의 알사탕은 달콤하다. 우리가 사는 달콤한 알사탕의 사회(社會) 어른이 되어서도 달콤한 알사탕을 달콤하다고 하는 사회(社會) 환상(幻想)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아버지보다 먼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보다 먼저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환상(幻想)이 필요하다. 여자(女子)가, 술이, 담배가, 섹스가, 도박이 필요하다. 섹스와 도박이 필요하다 민주시민(民主市民)은.
저 혼자 즐거운 건 오뚜기. 오뚜기를 보고 있으면 이조역사(李朝歷史)가 생각나고, 이조역사(李朝歷史)가 생각나면 한 사내가 떠오른다.
술을 몹시 좋아한 한 선비가 살았다 숙종 때. 장성(長城)으로 귀양을 가게 되자 그는 물었다. 그 곳에도 소주가 있느냐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는 말했다 됐다.
장성(長城)으로 정배(定配)되어 죽은 오도일(吳道一)은 환상국(幻想國)의 거지. 자(字)는 관지(貫之), 호(號)는 서파(西坡),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후학 윤겸(允謙)의 손자(孫子). 현종 계축(癸丑)에 문과급제(文科及第), 숙종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른바 동인(東人)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 그의 선조(先祖)인 숙보다 뛰어난 점은 단 하나 주량(酒量). 서인(西人)의 소론(小論)분자(分子). 서인(西人)의 소론분자(少論分子)라도 장성(長城)에 소주 있어 됐다는 그가 좋아 나는 매일 만난다. 환상국(幻想國)의 주막에서.
나의 싸움은 흰 색과의 싸움 나의 싸움은 순결(純潔)과의 싸움 왕자(王子)는 왕궁(王宮)에 살고 나는 매일 만난다 아버지보다 먼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저희들끼리 소주를 마시는 양평동(楊平洞)*의 아이들을.
* 양평동(楊平洞): `양평동(楊平洞)'의 바른 지명은 `양평동(楊坪洞)'이다. 필자가 고의로 고쳐 쓴 것임.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오규원 시인 / 환상 또는 비전
상상, 힘의 탄소동화작용. 늘 신생(新生)의, 사물 속에서 청색(靑色)의 물을 퍼 올린다. 사방향(四方向)의 길, 넓은 들판. 어디로 갈까?
그러나 잿더미, 무화(無化)시킨 대지 위에서만 타오르는 불빛―적색(赤色)의 환상. 잿더미 위라서 잘 보이는구나 무너지지 않은 벽(壁)과 무너지지 않는 길. 그 곳에 자리한 외로운 투명과 가시(可視)의 나라.
행복한 시대, 행복한 자(者)의 땅, 몽상. 저주 있기를. 황색(黃色), 그 권태의 산기슭에 아물아물 자라는 노란 풀잎들.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오규원 시인 / 황국(黃菊)
돌에 스미는 가을만큼 절망에 스미는 희망만큼 시장에 스미는 고요만큼
그 두께만큼 그 농도만큼 그 희귀만큼
서두르자 그만큼만 황국(黃菊)이여 접힌 가을의 모서리 속에 함께 접혀버린 나의 방문이여 우유배달부가 도착할 때마다 조간신문이 떨어질 때마다
서두르지 말고 그렇게만 그만큼만 대지의 통로인 황국(黃菊)이여 사랑이여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오규원 시인 / 희시
한 사람이 살다가 죽은 역사가 있습니다. 나무가 말을 한다는 신화를 믿은 한 바보가 살았지요. 그 사내는 한 그루 나무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지요. 기다리며 귀를 갈고, 기다리며 코를 갈고, 그렇게 한 그루 나무를 쳐다보며 살다가, 나무를 바라보는 눈 그대로, 귀 그대로 그곳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웃기지요? 그런데 한 사람이 죽었다는데, 왜 우리는 우습기만 한지 혹시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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