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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재삼 시인 / 소곡(小曲) -1-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6.

박재삼 시인 / 소곡(小曲) -1-

 

 

먼 나라로 갈까나.

가서는 허기(虛飢)져

콧노래나 부를까나.

 

이왕 억울한 판에는

아무래도 우리나라보다

더 서러운 일을

뼈에 차도록 당하고 살까나.

 

고향의 뒷골목

돌담 사이 풀잎 모양

할 수 없이 솟아서는

남의 손에 뽑힐듯이 뽑힐듯이

나는 살까나.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박재삼 시인 / 소곡(小曲) -2-

 

 

노래밖에 모른다 해도

귀뚜라미가 옮기는 가녀린 발이

달빛 그늘을 짓밟고 깔아뭉개고

그렇게 한다고는 혹시 생각하지 않는가.

 

이 한밤

나혼자 쉬는 한숨이

사랑하는 잠든 사람의

어깨 위에 어느새

살이 아픈 뼈가 아픈

천 근의 무게되어 얹혀 있는데!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

 

 


 

 

박재삼 시인 / 수양산조(垂楊散調)

 

 

궂은 일들은 다 물 아래 흘러지이다

강가에서 빌어 본 사람이면 이 좋은 봄날

휘드린 수양버들을 그냥 보아 버릴까.

 

아직도 손끝에는 때가 남아 부끄러운

봄날이 아픈 내 마음 복판을 뻗어

떨리는 가장자리를 볕살 속에 내 놓아…….

 

이길 수가 없다, 이길 수가 없다,

오로지 졸음에는 이길 수가 없다,

종일을 수양이 뇌어 강은 좋이 빛나네.

 

뜨거운 달, 근역서재, 1979

 

 


 

 

박재삼 시인 / 수정가(水晶歌)

 

 

집을 치면, 정화수(精華水)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平床)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에 순순(順順)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春香)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들 산신령(山神靈)은 그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리(萬里)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春香)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水晶)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슬픈 노래에 머물고

 

 

해와 달, 별은

천날 만날

하늘 속에 밖에는 뜰 줄 모르건만

우리가 우러르는 곳에

휘영청 높이 있고

한결로 빛나기 때문에

가장 거룩한 것이여!

 

새도 하늘을 나는

부러운 재주를 가졌건만

그러나 결국 땅에서 죽고 말고,

간혹 사람은 상상의 날개로

멀리 갈 수는 있지만

어차피 지상을 못 벗어나는 것.

 

아, 이 숙명을 읊는다는 것이

어쩔꺼나

슬픈 노래에 머물고,

새만도 못한

떨리는 목청으로 돌아오느니.

 

사랑이여, 실천문학사, 1987

 

 


 

박재삼 (朴在森. 1933년-1997년) 시인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1996 제4회 한국공간시인상 심사위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