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시(詩), 부질없는 시(詩)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6.

정현종 시인 / 시(詩), 부질없는 시(詩)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느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 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 한다면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시간도 비빔밥도 없는 거지

 

 

누가 마시다 남은 술

마시다 남은 물

마시다 남은 피

그런 건 다 나한테 오거라

내 속의 저 밑 빠진 거지

시간도 비빔밥도 없는 저 거지가

그걸 다

바닥난 슬픔처럼 말려

바람 불 듯 취하리니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시를 기다리며

 

 

시 안 써지면

그냥 논다

논다는 걱정도 없이

논다

놀이를 완성해야지

무엇보다도 하는 짓을

완성해야지 소나기가

자기를 완성하고

퇴비가 자기를 완성하고

허기(虛飢)가 자기를 완성하고

피가 자기를 완성하고

연애가 자기를 완성하고

잡지가 자기를 완성하고

밥이 자기를 완성하듯이

 

죽음의 태(胎) 속에

시작하는 번개처럼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시인(詩人)

 

 

아직도 일기장(日記帳)같은 거

학원일기나 희망일기 같은 걸,

사랑하며 망쳐 놓으며

심장(心臟)은 없고 바람뿐이며

재산(財産)은 수상한 피와 광기(狂氣)뿐이며

본능(本能)에 생각을 싣고

감각(感覺)에 정신(精神)을 싣고

꿈을 적재(積載)하는 무역(貿易)이 있으며

의사(醫師)와 약(藥)을 가장 미워하고

독자(讀者)를 가장 미워하고

십자가(十字架)를 자〔尺〕로 사용하다 들키고

죽음이 던지는 미끼에 매어달려 쩔쩔매고

망칙한 기쁨에 빠져서 부르짖고

사물(事物)을 캄캄한 죽음으로부터 건져내면서

거듭 죽고

즐거울 때까지 즐거워하고

슬플 때까지 슬퍼하고

무모(無謀)하기도 하여라

모든 즐거움을 완성(完成)하려 하고

모든 슬픔을 완성하려 하고……

시대(時代)의 소리에 자갈을 물리는 강도(强盜)를 쫓아 밤새도록 달리고 있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시창작(詩創作) 교실

 

 

내 소리도 가끔은 쓸 만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피는 꽃이든 죽는 사람이든

살아 시퍼런 소리를 듣는 거야

무슨 길들은 소리 듣는 거보다는

냅다 한 번 뛰어보는 게 나을 걸

뛰다가 넘어져보고

넘어져서 피가 나보는 게 훨씬 낫지

가령 전망이란 말, 언뜻

앞이 탁 트이는 거 같지만 그보다는

나무 위엘 올라가보란 말야, 올라가서

세상을 바라보란 말이지

내 머뭇거리는 소리보다는

어디 냇물에 가서 산 고기 한 마리를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걸

확실히 손에 쥐어보란 말야

그나마 싱싱한 혼란이 나으니

야음을 틈타 참외 서리를 하든지

자는 새를 잡아서 손에 쥐어

팔닥이는 심장 따뜻한 체온을

손바닥에 느껴보란 말이지

그게 세계의 깊이이니

선생 얼굴보다는

애인과 입을 맞추며

푸른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행동 속에 녹아버리든지

그래 굴신자재(屈伸自在)의 공기가 되어 푸르름이 되어

교실 창문을 흔들거나 장천(長天)에

넓고 푸르게 펼쳐져 있든지,

하여간 사람의 몰골이되

쓸데없는 사람이 되어라

장자(莊子)에 막지무용지용(莫知無用之用)이라

쓸데없는 것의 쓸데있음

적어도 쓸데없는 투신(投身)과도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가거라

너 자신이되

내가 모든 사람이니

불가피한 사랑의 시작

불가피한 슬픔의 시작

두루 곤두박질하는 웃음의 시작

그리하여 네가 만져본

꽃과 피와 나무와 물고기와 참외와 새와 애인과 푸른 하늘이

네 살에서 피어나고 피에서 헤엄치며

몸은 멍들고 숨결은 날아올라

사랑하는 거와 한몸으로 낳은 푸른 하늘로

세상 위에 밤낮 퍼져 있거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출생.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

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