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삼 시인 / 신(新) 아리랑
바다 두고 산을 두고 사랑이여, 너를 버릴 수는 없을지니라.
백리 바깥을 보는 네 산(山)처럼 아득한 눈을 어찌하고,
내 잘못을 거울처럼 받아 비추는 물같은 이마를 어찌하고,
복사꽃 피는 앵도꽃 피는 정다운 동네어구 입술을 어찌하고,
우거진 숲이여 네 시원한 머리카락을 어찌하고,
아, 어찌하고 어찌하고 고향의 능선(稜線) 젖가슴을 어찌하고,
바다 있기에 산이 있기에 사랑이여, 너를 버릴 수는 없을지니라.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
박재삼 시인 / 신록(新綠)을 보며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바닷가에서 자라 꽃게를 잡아 함부로 다리를 분질렀던 것, 생선을 낚아 회를 쳐 먹었던 것, 햇빛에 반짝이던 물꽃무늬 물살을 마구 헤엄쳤던 것, 이런 것이 일시(一時)에 수런거리며 밑도 끝도 없이 대들어 오누나.
또한 이를 달래 창자 밑에서 일어나는 미풍(微風) 가볍고 연한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누나.
아, 나는 무엇을 이길 수가 있는가.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
박재삼 시인 / 아기 발바닥에 이마 대고
1년 5개월짜리 상규(祥圭)의 잠자는 발바닥 골목 안과 뜰 안을 종일 위험하게 잘도 걸어다녔구나. 발바닥 밑으로 커다란 해를 넘긴 어여쁘디 어여쁜 발아. 돌자갈 깔린 길보다도 험한 이 애비의 이마를 한 번 밟아 다오. 때 안타는 연한 발아.
어린 것들 옆에서, 현현각, 1976
박재삼 시인 / 아득하면 되리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
박재삼 시인 / 아름다운 천
나는 그대에게 가슴 뿌듯하게 사랑을 못 쏟고 그저 심약한, 부끄러운, 먼 빛으로만 그리워하는, 그 짓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가리라고 봅니다. 그런 엉터리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남들은 웃겠지만, 나는 그런 짝사랑을 보배로이 가졌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짠 아름다운 천을 두르고 있다는 것이 이 가을, 갈대소리가 되어 서걱입니다. 가다가는 기러기 울음을 하늘에 흘리고 맙니다.
사랑이여, 실천문학사, 1987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태일 시인 / 다시 산하(山河)에게 외 3편 (0) | 2020.05.17 |
|---|---|
| 정현종 시인 / 애인들 외 5편 (0) | 2020.05.17 |
| 곽은영 시인 / Galaxy Express 999 외 1편 (0) | 2020.05.16 |
| 길상호 시인 / 쪽방의 여름 외 1편 (0) | 2020.05.16 |
| 이기인 시인 / 아프지 않아요ㅡ구름 (0) | 2020.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