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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애인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7.

정현종 시인 / 애인들

 

 

  1

 

  함정이 땅 속에 숨고

  사슬이 바람에 뜨듯이, 그래

 

  자물쇠가 열쇠에 녹듯이

  바라보며 녹는 눈―

 

  2

 

  네 발로 기고 싶으며

  옷은 털과 같다

 

  신발엔 피가 흐르고

  길은 풀밭과 같다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좋아한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어떤 평화

 

 

오후의 산촌(山村).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 하나가 앉아서 소가 풀 먹고 새김질 하는 걸 바라보고 있다. 가까이 가는 사람도 못 느끼고 정신없이 보고 있다. 문득 나를 알아차리고 쳐다보며 얼른 ꡒ어디 살아요?ꡓ 하고 묻는다. ꡒ나는 서울 사는데 너는 여기 사니?ꡓ목소리를 듣자마자 천하를 안심하고 다시 소한테로 눈길을 돌린다. 소 주려고 우리 바깥에 있는 짚을 한움큼 집는데 아이가 좋아하는 얼굴로 ꡒ그거 잘 먹어요ꡓ 한다. 그 목소리 속에는 친근감과 기쁨이 들어 있다(자기가 하는 짓을 낯선 사람도 하는 데서 느끼는 친근이요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내 마음에 또렷한 그 `풀 먹고 있는 소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아이' 의 사진을 나는 가끔 바라본다. 잊히지 않는 그림. 지지 않는 꽃. 평화여.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얼음 조각들이

 

 

너는 어려서부터

가혹하리만큼 겪는다

아, 사람이 있는 데는 왜 모두 이럴까?

집도 학교도 일터도

하여간 네가 있을 만한 데가 별로 없다

가령 어느 날

친구들이 너를 겨울 바다로 몰아넣지?

거기 둥둥 떠 있는 얼음 조각들을

너는 밟으며 물 위를 걸었지?

얼음 조각들이 너를 받쳐주었지?

아슬아슬했지만

너를 받쳐준 건

얼음 조각들뿐이었구나!

그만하면 걸어갈 만하지 않느냐!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외출(外出)

 

 

한기(寒氣) 스며들어

으시시한 물의 마음

하염없는 정감(情感)으로 별빛만

있고 바람만 있는 여기

모래의 마음으로

지금은 바깥을 걷고 있네.

 

골수(骨髓)에 빠져 있는 우수(憂愁)며

지껄이며 오는 욕망 또는

머리에 가득찬 의식(意識)의 불

사이서 믿을 수도 없이

장난하고 싶은 마음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으로

걷고 있네 봄밤의 길을.

 

공기(空氣)는 낮에 시달리다가

지금은 고요와 고요의 다리가 되어

가등(街燈)의 공기는 가등 곁에서

나무의 공기는 나무 곁에서

제 것인 색채(色彩)와

제 것인 가락으로 흐르고 있지만

여기 우리는 나와 있네

고향(故鄕)에서 멀리

바람도 나와 있고 불빛도

평화(平和)가 없는 데를 그리움도 나와 있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이 나라의 처녀들아

 

 

장가 못 가서 자살한

시골 총각들 일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니

마음에 자꾸 걸리는 게다

이 지상의 생물 중에 도대체

암컷 못 만나 자살한 수컷 있다는 말 못 들었는데

적어도 사람이

사람 중에도 제일가는 사람인 농부가

농부 중에도 햇덩이 같은 총각들이

장가를 못 가 고민이요

고민하다 더러 자살도 하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군소리지만, 그러니

신바람은 어디서 날 것이며

시골 살림은 누가 하고

농사 대물림은 어찌 될 것인가

그리하여 식량은 또 어찌 될 것인가)

 

이 나라의 처녀들아

저 생명의 원천 흙기운을 두고 묻노니

저 너무 맑아서 달디단 시골 공기를 두고 묻노니

저 시골 총각들의 튼튼한 사지(四肢)를 두고 묻노니

아직도 거기엔 그래도 남아 있는

넉넉한 인심을 두고 묻노니

일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두고 묻노니

"사람들은 죽으려고 도시로 모여든다"라고

한 시인이 말한 그 도시로 모여드는

이 나라의 처녀들아

 

무슨 대답 좀 해주렴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출생.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

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