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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 / 애인들
1
함정이 땅 속에 숨고 사슬이 바람에 뜨듯이, 그래
자물쇠가 열쇠에 녹듯이 바라보며 녹는 눈―
2
네 발로 기고 싶으며 옷은 털과 같다
신발엔 피가 흐르고 길은 풀밭과 같다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좋아한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어떤 평화
오후의 산촌(山村).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 하나가 앉아서 소가 풀 먹고 새김질 하는 걸 바라보고 있다. 가까이 가는 사람도 못 느끼고 정신없이 보고 있다. 문득 나를 알아차리고 쳐다보며 얼른 ꡒ어디 살아요?ꡓ 하고 묻는다. ꡒ나는 서울 사는데 너는 여기 사니?ꡓ목소리를 듣자마자 천하를 안심하고 다시 소한테로 눈길을 돌린다. 소 주려고 우리 바깥에 있는 짚을 한움큼 집는데 아이가 좋아하는 얼굴로 ꡒ그거 잘 먹어요ꡓ 한다. 그 목소리 속에는 친근감과 기쁨이 들어 있다(자기가 하는 짓을 낯선 사람도 하는 데서 느끼는 친근이요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내 마음에 또렷한 그 `풀 먹고 있는 소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아이' 의 사진을 나는 가끔 바라본다. 잊히지 않는 그림. 지지 않는 꽃. 평화여.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얼음 조각들이
너는 어려서부터 가혹하리만큼 겪는다 아, 사람이 있는 데는 왜 모두 이럴까? 집도 학교도 일터도 하여간 네가 있을 만한 데가 별로 없다 가령 어느 날 친구들이 너를 겨울 바다로 몰아넣지? 거기 둥둥 떠 있는 얼음 조각들을 너는 밟으며 물 위를 걸었지? 얼음 조각들이 너를 받쳐주었지? 아슬아슬했지만 너를 받쳐준 건 얼음 조각들뿐이었구나! 그만하면 걸어갈 만하지 않느냐!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외출(外出)
한기(寒氣) 스며들어 으시시한 물의 마음 하염없는 정감(情感)으로 별빛만 있고 바람만 있는 여기 모래의 마음으로 지금은 바깥을 걷고 있네.
골수(骨髓)에 빠져 있는 우수(憂愁)며 지껄이며 오는 욕망 또는 머리에 가득찬 의식(意識)의 불 사이서 믿을 수도 없이 장난하고 싶은 마음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으로 걷고 있네 봄밤의 길을.
공기(空氣)는 낮에 시달리다가 지금은 고요와 고요의 다리가 되어 가등(街燈)의 공기는 가등 곁에서 나무의 공기는 나무 곁에서 제 것인 색채(色彩)와 제 것인 가락으로 흐르고 있지만 여기 우리는 나와 있네 고향(故鄕)에서 멀리 바람도 나와 있고 불빛도 평화(平和)가 없는 데를 그리움도 나와 있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이 나라의 처녀들아
장가 못 가서 자살한 시골 총각들 일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니 마음에 자꾸 걸리는 게다 이 지상의 생물 중에 도대체 암컷 못 만나 자살한 수컷 있다는 말 못 들었는데 적어도 사람이 사람 중에도 제일가는 사람인 농부가 농부 중에도 햇덩이 같은 총각들이 장가를 못 가 고민이요 고민하다 더러 자살도 하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군소리지만, 그러니 신바람은 어디서 날 것이며 시골 살림은 누가 하고 농사 대물림은 어찌 될 것인가 그리하여 식량은 또 어찌 될 것인가)
이 나라의 처녀들아 저 생명의 원천 흙기운을 두고 묻노니 저 너무 맑아서 달디단 시골 공기를 두고 묻노니 저 시골 총각들의 튼튼한 사지(四肢)를 두고 묻노니 아직도 거기엔 그래도 남아 있는 넉넉한 인심을 두고 묻노니 일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두고 묻노니 "사람들은 죽으려고 도시로 모여든다"라고 한 시인이 말한 그 도시로 모여드는 이 나라의 처녀들아
무슨 대답 좀 해주렴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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