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조태일 시인 / 다시 산하(山河)에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7.

조태일 시인 / 다시 산하(山河)에게

 

 

1

 

불꺼진 시간 위에서 이제 아픈 기억을 쓰다듬는 나의 산하.

수목들은 이파리에

찢어진 지표(地表)를 펄럭이고 있지만

피비린 골짜기마다, 젖어 있는 시간은 뒹굴고 있지만

선언을 다한 지상의 탄우(彈雨)가 내리던

나의 조그만 산하여.

아침 햇살 빗어 내리듯

일월(日月)의 가장 슬픈 인종(忍從)을 빗어 내리는

멀고 가까운 사랑을 뿌리며, 선사(先史)의 비는 내리고

쓸쓸히 돌아간 유골(遺骨)의 음성이 선량한 박수처럼

산하여, 나의 아픈 기억 위에 내리고 있다.

넘쳐 흐르는 예감이 아닐지라도

나의 슬픈 산하여.

씨 한톨의 내부에서 부서지는 세계의

오랜 사연을 철썩이면서

이젠 깨어날까?

 

2

 

산정에 올라서 나는 너의 치맛자락을 슬프게 붙들고 있다.

장군(將軍)들의 아이들이

꿈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던 새벽 언제쯤이었던가.

피 흘리며 뚝뚝 지던 시간의 동체를 문지르며

너의 옷자락으로 숨어들던 표성과

맹수들의 팔다리에 엉키던 신앙의

전언(傳言)은 무엇이었을까.

탄피의 고요만이

피를 말리는 서정 위에 잠들어 있고

격한 메아리가 밀리던 바위 밑에서

눈먼 나의 새는 햇살을 쪼고 있다.

그러나 산하여.

나는 너의 형체를 기억할 수가 없다.

나의 성장을 흔들며 울다 간 화조의 몸부림이

나의 언어를 흔들지라도

강의실 구석마다 아로새겨진

진리의 턱수염을 거칠게 흔들지라도

너의 우울했던 나날

포성에 묻어간 너의 노래를

산하여, 너의 색채를 기억할 수가 없다.

 

3

 

학동들의 발끝에서 묻어나는

결의(決意)의 아침

아직 살아남은

원인들을 달래며 아픈 기억을 씻는 풍물들.

오래인 동면의, 타다 남은 가지마다 돌멩이마다

식욕들의 푸른 항변이 묻어 있다.

가녀린 사슴의 뿔 위에 내리던

달빛 별빛들의 안부여.

너로 하여 사는 세월이 감기게 감기게

나의 산하는

화답하는 풍물들을 보듬을 수 없을까.

그리하여 산하는

이제 나의 독재 안에서 차라리

방황하게 하라.

방황하게 하라.

 

아침 선박, 선명문화사, 1965

 

 


 

 

조태일 시인 / 된장

 

 

님아,

너의 썩은 얼굴에 침

아니고 콩을 붙인다

 

흰자질이랑 탄수화물을 붙이고

물도 굳기름도 붙이고

비타민을 붙인다 소금을 붙인다

 

한 많은 찌꺼기를

정 도타운 부부를 붙인다.

아아, 현명한 된장을 붙인다.

 

님아,

너의 썩은 얼굴에 미움

아니고 새로운 머리카락을 붙인다

 

눈썹이랑 눈을 붙이고

코도 입도 붙이고

턱을 붙인다 귀를 붙인다

 

희고 억센 이빨을

거칠은 살결을 붙인다

아아, 뜨거운 목소리를 붙인다.

 

시여,

나의 얼굴을

너에게 붙인다.

 

식칼론, 시인사, 1970

 

 


 

 

조태일 시인 / 모래․별․바람

 

 

저 파도 우는 소리 듣고파서

저 넓은 가슴팍에 안기고파서

수많은 모래들은 밤낮으로

바닷가에 귀 세우고 모여 앉아

끼리끼리 몸 비비며 반짝일 뿐!

헤어져 돌아올 줄 모른다.

 

저 대낮의 잠이 그리워서

저 가없는 푸름에 안기고파서

수많은 별들은 긴긴 밤을

달 주위에 모여 뜬 눈으로 반짝일 뿐!

돌아앉아 눈감을 줄 모른다.

 

저 일렁이는 숲의 숨결을 듣고파서

저 깊고 푸른 고요를 일깨우고파서

수많은 바람들은

잎새에 붙어 조잘거릴 뿐!

돌아와 폭풍이 될 줄 모른다.

 

아직은 모래고 별이고 바람일 뿐!

헤어져 돌아올 줄 모른다

돌아앉아 눈감을 줄 모른다.

돌아와 폭풍이 될 줄 모른다.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조태일 시인 / 목소리

 

 

잃어 버린 목소리를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잃어 버린 목소리를

어디 가면 되찾을 수 있을까,

 

바람들도 만나면 문풍지를 울리고

갈대들도 만나면 몸을 비벼 서걱거리고

돌멩이들도 부딪치면 소리를 지르는데

참말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들은 늘 만나도 소리를 못 내니

참말로 이상한 일이다.

 

산천(山川)은 변함이 없고

숨결 또한 끊어지지 않았는데

참말로 이상한 일이다.

입들은 벌리긴 벌리는데

그 폼만 보이고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목소리는 아예 목청에 가둬 뒀느냐,

산천(山川)에 잦아들었느냐,

내 귀가 멀어서

고막이 울지 못하느냐,

 

내 오관(五官)을 뒤집고 보아도

폼만 보이고 껍데기만 보이고

목소리를 만날 수가 없구나.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조태일(趙泰一. 1941년-1999년) 시인

전남 곡성 출생. 1970년대 유신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시를 발표하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러 '저항시인'으로 불렸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경희대 대학원 문학 석사학위(1985), 박사학위(1991)를 받음. 196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1964년, 시 〈아침선박〉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1969년 월간 시 전문지 〈시인〉을 창간해 김지하·양성우·김준태 등을 등단시킴. 1974년에는 고은·백낙청 및 신경림·염무웅·박태순·황석영·조해일 등과 함께 민족문학운동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을 주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87년 9월 17일 창립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모체가 됨. 1989년 이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1994~1999 예술대학장을 역임.

시집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연가〉(1985), 〈자유가 시인더러〉(1987), 〈산속에서 꽃속에서〉(1991) 등을 펴냄.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1995)로 제10회 만해문학상을 수상. 1991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2년 편운문학상, 1993년 성옥문화상, 1995년 만해문학상을 받음. 사후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