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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시인 / 3분간
씻은 그릇을 헹구는데, 누가 죽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텔레비젼을 덮는 비애 속 장의 행렬이 서서히 나아간다. 거룩한 죽음인 모양이다. 행주로 그릇들을 닦아 찬장에 챙기면서 그녀는 한 죽음이 장엄한 장식으로 아늑한 빛으로 덮이는 것을 힐끗 본다. 어린이 프로는 막 끝난 듯, 아들은 과자를 물고 안델센을 읽고, 그녀는 탁자 가에 묻은 도마도 캐찹을 닦아내면서 09 : 03의 숫자 아래서 아나운서가 하염없이 한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나른히 본다. 된장그릇을 찬장 속 간장종지 곁에 조심스럽게 놓을 때 누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칼을 수돗물에 씻으며 보니 죽은 이의 딸이다. 09 : 04의 숫자가 그 여자의 풍성한 검은 머리칼 위로 찍힌다. 아들이 안델센을 놓고 밖으로 나간다, 현관문을 열어 놓은 채. 그녀는 숟가락들을 물에서 건져내어 마른 행주로 닦으면서, 장의차를 장식한 것이 국화… 국화, 꽃, 사이로 아이가 뛰어… 아니… 현관문을 지나 아들이, 뛰어가는 것을 본다. 09 : 05의 숫자가 전신주가 팔을 벌린 시가지 위로 장의 행렬을 멀리한 채 찍힌다. 아나운서의 소리들이 시끄럽게 텔레비젼 아래로 떨어져 재떨이에 쌓이고, 그녀는 남은 물을 하수구에 붓는다.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텔레비젼 채널을 돌린다. 때맞춰 요리 강좌의 자막이 국화 꽃꽂이 위로 흐른다.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이하석 시인 / MADE IN U.S.A
이슬 투명한 물방울의 아침 빈, 얇은, 명료한 차가움 속으로 돌들과 쇠들 산그림자들 비쳐든다. 깡통 곁 허물어진 흙들에 볼 비비며 달개비꽃 벙그는 한때. 휴지 속에 구겨진 채 여자 노랑머리칼엔 달개비꽃 꽂혀 낡은, 흙 묻은 글씨로 날아가는 상표.
불꽃도 깡통 태우고 찬란히 하늘 날아가 버렸다. 빈 몸만 남아 재 끌어모을 때 싸늘한 녹슨 쇠의 고즈넉한 성이 하나 달개비꽃 밑으로 허물어지고.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 / 가랑비야, 한국시를 찬양하라
가랑비가 끝장난 길 위에 내린다. 주머니 속에 접어 넣어둔 시 쓴 종이를 감춘 손으로 한 번 더 구긴다. 감춘 시를 써왔구나, 나는. 부패한 물들이 하수구로 흘러들고 나의 그림자가 그 위를 맴돌고 가랑비가 그 위에 내린다.
사람들은 우울하게 우산을 들고 정류장에 서 있다. 붉은 블록 조각들 처참하게 깔린 길 위로 전경들과 대학생들 뒤엉켜 피흘리고 흩어진 다음, 버스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문득 제각기 갈 길이 바빠지고 가랑비가 그 위에 내린다. 모든 길이 비에 젖어 젖지 않은 종이가 없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이하석 시인 / 가야산
계류와 더불어 칭얼대며 내가 숨긴 길. 동굴의 숲가엔 얼레지꽃들이 고개숙인 채 나의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 짧은 생애들의 외롭고 강렬한 눈길 따돌리며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조릿대숲이 앙칼지게 울며 열린다. 큰 바람이 내 욕망을 뒤집느라 웅성거린다.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바람의 칼날이 조각하다 부러뜨린 나뭇가지 끝에 간밤에 눈이 얼리고 간 내 꿈이 싹트고, 산정에서 뒤엉키는 내 마음의 사나운 구름.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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