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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란숙 시인 / 시뮬라크르의 눈물
거울은 천천히 돌고 밤이 깊어 모든 것은 얕은 물속이다
이마까지 물은 들어차 있고 물속에서야 지느러미를 드리우는 나는 그대의 얼굴이 희미할 뿐이다
그대의 얼굴이라고 쓰니 눈물이 돋는다 물에서 물이 돋아난다
그대가 그랬다 공중의 계단을 건너 그대는 불쑥 돋아났고 빗속에서 그대는 터치 하나의 반듯한 빗방울로 돋아났다
밤은 이미 깊어 돌아갈 길은 가깝고 가까운 지척이다
이백 사십 분 후 이 얕은 물은 다시 빛으로 깊어질 것이고 두 눈을 사뿐히 묶인 나는 다만 그대의 얼굴을 볼 수 없을 뿐이다
협박은 마시라, 그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
이미 거울의 곁가지에서 그대의 눈동자가 그대의 숨결이 돋아나고 돋아나고 돋아나고 있으므로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가을호
엄란숙 시인 / 허몽도(虛夢圖)
허몽이라고 그대는 이름 하였으나 족두리 쓴 붉은 구름이 어찌 꼭 허몽이겠소
붉은 구름의 이마를 밟고 선 두 마리 학의 발목이 젖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나
족두리 위의 밀화구슬 진주구슬 가늘게 흔들리고 오색의 작은 술들 무겁게 떨리지만
그대 총총한 걸음 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주억주억 마음을 삼키는 것이라는 것
그대 따라가려는 말들, 지저귀는 종달새의 발목에나 묶어 보내리니
족두리 쓴 붉은 구름이 어찌 꼭 슬픔이겠소 허몽이라고 그대는 이름 하였으나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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