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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덕규 시인 / 독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7.

박덕규 시인 / 독서

 

 

나는 가끔 소리 내 책을 읽는다.

그러다 갑자기 울컥 해서 목이 멜 때가 있다.

무슨 슬픈 장면이어서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방에 누워 책을 소리 내 읽고 있는데

뒤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계시던 어머니가

어느 대목에선가 쯧쯧 딱하지,

하고 혀를 차셨다.

 

그 소리가 책 읽고 있는 내 귓전에 울리곤 해서다.

돌아봐도 어머니가 뒤에 앉아 계시지 않다는 걸

내 몸이 어김없이 알아서다

 

 


 

 

박덕규 시인 / 등이 아픈 사랑

 

 

배가 아프면 움켜쥔다.

마음이 아프면 가슴에 두 손을 모은다.

 

갑자기 코피가 쏟아지면

 무식하게

 장갑 낀 주먹으로 문댈 수도 있다.

 

등이 아프면

 등이 아프면

 거북처럼 바닥에 발랑 뒤집어져

 허연 배 다 드러내고 버둥거려도

 

 아픈 등은

 아픈 데는

 안 아파지지 않는다.

 

2019년 10월 7일(월) 중부일보

 

 


 

 

박덕규 시인 / 몽롱한 청춘

 

 

몽롱

몽롱 몽롱

 

몽롱한 의식 구조를 가진 아이가

몽롱한 섬유 조직을 가진 안개 속을 헤쳐 나간다

몽롱한 안개 조직을 가진 꿈들이

 

몽롱한 장래 희망을 가진 세월 속을 걸어간다

몽롱한 부속 기관을 가진 자동차

몽롱한 발성 기관을 가진 새

 

몽롱한 비행 공간을 가진 새들이 머뭇거린다

몽롱한 낙하 공간을 가진 빗방울들이 주춤거린다

 

몽롱 몽롱

 

몽롱한 지역 감정을 가진 안개들의 대립

몽롱한 순환 논리를 가지 혹성들의 인력

몽롱한 결합 체계를 가진 원자들의 운동

 

몽롱한 시대 구분을 가진 역사

몽롱한 항의 목적을 가진 아이들의

몽롱한 용감 무쌍을 가진

 

몽롱한 달밤 풍경을 가진 서울들의

몽롱한 지성 감성을 가진 아이

 

몽롱한

몽롱한 안개 조직을 가진

몽롱한 몽롱한

 

몽롱한 유전 인자를 가진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소설가)

1958년, 경북 안동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0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아름다운 사냥>, <골목을 나는 나비> 등. 2005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2014.1 한국문예창작아카데미 회장. 1982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 1982 중앙일보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 1992 편운문학상 수상. 2001 제14회 경희문학상 소설부문 수상. 2015.5 제30화 이상화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