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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건희 시인 / 꽃의 자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7.

김건희 시인 / 꽃의 자리

 

 

나갔던 상여가 꽃으로 돌아오는 곳에

벌통을 놓아둔다

 

눈꺼풀조차 가벼운가요? 거긴

 

꽁꽁 언 입술 어머니

자식위해 꽃가루 나르던

그 들길 건너 야산에는 지금

눈조차 온통 시큰한 흰 섬

 

어머니 지금

항로를 놓치고 다시 회항하고 싶었던 걸까요

울음으로 놓던 다리를 지상으로 펼친 곳에서

무덕무덕 피어나는 아카시아 꽃

 

먼 길 휘어져가며 흘린 눈물이

배꼽에서 소실점을 꺼낼 때

어머니 놓던 벌통을 이제

내가 놓을 때

 

상여집 앞에 펄럭이는

흰 부적들

 

 


 

 

김건희 시인 / 눈사람

 

 

올 나간 스타킹을 당기는데

눈송이들이 딸려 나왔다

 

눈은, 저녁에야 돌아온다고 했다

 

하루가 힘겨운 히말라야시다가 먼저 젖었다

 

참새들이 잠들기 위해 찾아드는 나무였는데

눈덮고 귀덮도 코덮고 입덮어

어깨 무거운 석불이 되어 있었다

 

깊어가는 상념의 앞가슴 합장한 두 손의 가지런함에

히말라야시다, 그녀의 저녁은

끊임없이 송이눈 뭉쳐 눈을 닦는다

 

나무의 무거워진 횡격막 아래에서

솜뭉치 헤집고 열리는 노란 가슴

들숨과 날숨으로 피운 복수초가

어미닭 뱃속 알처럼 웅크렸다

 

곱은 내 손에 놓이는 한 공기 쌀밥의 따스함을

난 오래 기억할 거야

 

올이 나간 밥주머니를 잘라 낸 당신

 

비틀비틀 귀가할 저녁의 빙판길에

나 반가운 눈사람이 되어 서 있을 거야

 

 


 

 

김건희 시인 / 모래화가

 

 

울퉁불퉁한 생각들은

눌러 밟고 걷기보다는

떨어진 솔방울인 듯 툭툭 걷어차야 한다

그건 오랜 관습, 바람이 메마른 솔잎 걷어 내자

모래 위 걸어가는 낙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맨발로 앞서 가던 낙타는 보이지 않고

서두르지 않았는데 저녁은

발자국을 움푹하게 찍었다

사막을 걷는 일상, 등에 진 외로움 때문에

십 리 밖 물 냄새에도 나는 예민해졌다

밖을 뒤집어 안으로 밀어 넣거나

안을 뒤집어 쌓는 화폭

나는 누군가 지나간 문양을 발끝으로 지우는 화가였다

슬며시 몸 돌려 바라본 모래 위

고통과 나란히 찍힌 내 발자국은

가벼운 바람조차 이기지 못하고 사그라진다

지난겨울 폭설로 고요했을 이곳에

낮게 누워 있는 낙타 한 마리

모이통 헐렁한 새를 만나

침침한 눈 부빈다

 

2018년 제3회 《미당문학》 신인작품상 등단시

 

 


 

김건희 시인

2018년 제3회 《미당문학》 신인작품상 등단. 최충문학상 산림문화공모전 수상. 현재 대구문인협회회원, 형상시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