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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기인 시인 / 아프지 않아요ㅡ구름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6.

이기인 시인 / 아프지 않아요-구름

 

 

  지나가는 버스 끝을 놓치고

 

  버스의 맨 뒷좌석에 앉아있는 이의 슬픈 얼굴을 놓치고

 

  오래된 실밥 무늬의 자국을 가끔씩 더듬어 보는 아이가 말한다

 

  “햇빛 뒤에 하늘이 있어요, 그런데 저 구름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양이에요”

 

  아주 오래 전에 심혈관센터 병동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침대를 보면서

 

  구름처럼 무용(無用)하다고 생각하였던 두 무릎을 꿇고서

 

  웃는 아이의 얼굴을 다시 보여 달라고 이 땅과 비스듬히 스러져서 운 적이 있다

 

  하늘의 구름은 하얀 붕대를 풀고 하얀 병실로부터 퇴원하고 싶다

 

  햇빛 뒤에서 옹기종기 모인 구름은 심실과 심방의 결손 구멍을 하나씩 메우고 있다

 

  “무릎을 꿇었던 구름이 무릎을 펴고 일어나서 걸어가요”

 

  버스의 끝을 좇는 아이와 구름은 희소한 무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나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한 몸의 무늬를 가지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2008년 가을호 발표

 

 


 

이기인 시인

1967년 인천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성균관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창작과비평사, 2005)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