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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재삼 시인 / 어지러운 혼(魂)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8.

박재삼 시인 / 어지러운 혼(魂)

 

 

겨우 예닐곱살난 우리를 그리 사랑하신 남평문씨(南平文氏) 부인(夫人)은

서늘한 모시옷 위에 그 눈부신 동전을 하나 달고 계셨던 그와도 같이

마음 위에 늘 또하나 바래인 마음을 관(冠)올려 사셨느니라.

 

그것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그 짐 때문에,

어이할까나,

갈앉아지기로는,

몸을 풀어 사랑을 나누기로는,

바다밖에 죽을 데가 없었느니라.

 

혼(魂)도 어여쁜 혼(魂)은, 우리의 바다에 살아 바다로 구경나선 눈썹 위에서, 다시 살아 어지러울 줄이야……

밝은 날, 바다 밑이 이세상 아니게 기웃거려지는 한려수도(閑麗水道)를 크고 너른 꽃 하나로 느껴 보아라. 우리는 한시도 가만 못 있는 지껄이는 이파리 되어, 누구에게 손잡혀 따라가며 따라가며 크고 있는가.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여름 가고 가을 오듯

 

 

여름 가고

가을 오듯

해가 지고

달이 솟더니,

 

땀을 뿌리고

오곡을 거두듯이

햇볕 시달림을 당하고

별빛 보석을 줍더니,

 

아, 사랑이여

귀중한 울음을 바치고

이제는 바꿀 수 없는 노래를 찾는가.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

 

 


 

 

박재삼 시인 / 여름반(半) 가을반(半)

 

 

낮에는 쨍쨍한 불볕을 살에 받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찬바람도 더러 느끼는

이 여름반(半) 가을반(半)

그러나 그것이 다시 가을날씨 하나로

기울어져 시세가 나다가

가을반(半) 겨울반(半)을 겪다가……

 

하늘의 이 그윽한 움직임에는

사람은 지치는 일 없건만

한 목숨씩 따로따로

열매처럼 거두어 들이느니,

혼령은 놔두고

살만 거두어 들이느니,

 

하늘의 이치는 우리로 하여금

죽은 이의 혼령과

산 사람이 반반(半半)씩 어울리게도 하고

또 딴 하늘을 예비해 놓고

거기서도 없는 듯이 반반(半半)씩

참가하게 하느니,

 

우리가 하늘 아래 산다는 것은

언젠가는 살하고 혼령하고를

따로 따로 나누어도

하나도 불편함이 없도록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는 그것인지도 모를레라.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

 

 


 

 

박재삼 시인 / 연(鳶)은 소년 따라

 

 

고목(古木)에 걸린 연(鳶)은

그 주인(主人)인 소년이 허공에 대고 하던

목청 높은 울음을 그대로 옮겨

바람 앞에 대신하고 있더니,

 

동동동 발을 뒹굴던 그것도

집쪽을 향해 달려가던 그것도

설 찬 허무(虛無)도 애달픔도 그 무엇도

동네가 다 알게 대신하고 있더니,

 

그 소년 이제는 흐느낌도 잦아들어

이불 속 추운 별밭

드디어 잠을 묻어버리자

에라, 나도 별 수 있나,

그 얼굴을

언제 움틀지 모르는

앙상한 가지 끝에

꼼짝 못하게

칭칭 동여매고 말았다.

 

대관령 근처, 정음사, 1985

 

 


 

 

박재삼 시인 / 열 몇살 때

 

 

열 몇살 때던가

제비떼 재재거리는

여학교 교문 앞을

발이 떨리던 때는

그런대로 그 비틀걸음에는

가락이 실려 있었다.

 

찬란한 은행잎을 달고

찬송가가 유독 출렁거리던

마음 뒤안에 깔린 노을을……

 

아직도 그 여학생들의

옷태가 머리태가 좋으면서, 기쁘면서,

또한 그를 사랑하면서,

 

이제는 너무 멀리

그 교문 앞을 지나와버린

부끄러움도 가락도 없는

내 발걸음이 섭섭할 뿐이다.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박재삼 (朴在森. 1933년-1997년) 시인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1996 제4회 한국공간시인상 심사위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