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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잎 하나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8.

정현종 시인 / 잎 하나로

 

 

세상일들은

솟아나는 싹과 같고

세상일들은

지는 나뭇잎과 같으니

그 사이사이 나는

흐르는 물에 피를 섞기도 하고

구름에 발을 얹기도 하며

눈에는 번개 귀에는 바람

몸에는 여자의 몸을 비롯

왼통 다른 몸을 열반처럼 입고

 

왔다갔다 하는구나

이리저리 멀리멀리

가을 나무에

잎 하나로 매달릴 때까지.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자기자신의 노래

 

 

  거리를 걸어가다가 나는 느닷없이 부끄러웠다(방법이 없는 부끄러움은 물론 의심할 만하다) 나는 하여간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의 눈물의 양(量)만큼 부끄러웠을 것이다. 나의 사랑의 양(量)만큼 부끄러웠을 것이고 나의 파멸의 양(量)만큼 부끄러웠을 것이다.

 

(이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은 나보다 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자장가

 

 

잠들라

농부들이 땀과 가슴과

생전(生前)을 모두

땅에 묻듯이

 

잠들라

석탄처럼 묻혀 있는 광부들을

아무도 캐내지 않듯이

 

잠들라, 무엇보다도

이 나라 원혼(寃魂)들의

기나긴 그림자,

살에 파고드는 그

무한 슬픔이

너를 적시듯이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잔악한 숨결

 

 

너무 맑은 바람은 갈증

너무 밝은 햇빛은 그리움

너무 투명한 것들의 보석(寶石)의 광기(狂氣)

 

이 맑은 공기의 한숨

밝은 햇빛의 고독

모든 투명한 것들의 잔악한 숨결!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잠꼬대

 

 

잠꼬대―

너무 깊고

너무 슬프고

그리고

무섭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잡념

 

 

    잡념 레퍼터리, 천당을 가까이

    잡념 레퍼터리, 지옥을 가까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나도 모르게

  잡념인가 봐

 

  그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기고

  저절로 꺼지고

  출입이 자재(自在)하니

 

  그다지 스스로 있는 걸 어찌

  좋다 하지 않으리오,

  잡념의 볼기짝이여

  잡념의 귀싸대기여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출생.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

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