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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 / 잎 하나로
세상일들은 솟아나는 싹과 같고 세상일들은 지는 나뭇잎과 같으니 그 사이사이 나는 흐르는 물에 피를 섞기도 하고 구름에 발을 얹기도 하며 눈에는 번개 귀에는 바람 몸에는 여자의 몸을 비롯 왼통 다른 몸을 열반처럼 입고
왔다갔다 하는구나 이리저리 멀리멀리 가을 나무에 잎 하나로 매달릴 때까지.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자기자신의 노래
거리를 걸어가다가 나는 느닷없이 부끄러웠다(방법이 없는 부끄러움은 물론 의심할 만하다) 나는 하여간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의 눈물의 양(量)만큼 부끄러웠을 것이다. 나의 사랑의 양(量)만큼 부끄러웠을 것이고 나의 파멸의 양(量)만큼 부끄러웠을 것이다.
(이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은 나보다 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자장가
잠들라 농부들이 땀과 가슴과 생전(生前)을 모두 땅에 묻듯이
잠들라 석탄처럼 묻혀 있는 광부들을 아무도 캐내지 않듯이
잠들라, 무엇보다도 이 나라 원혼(寃魂)들의 기나긴 그림자, 살에 파고드는 그 무한 슬픔이 너를 적시듯이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잔악한 숨결
너무 맑은 바람은 갈증 너무 밝은 햇빛은 그리움 너무 투명한 것들의 보석(寶石)의 광기(狂氣)
이 맑은 공기의 한숨 밝은 햇빛의 고독 모든 투명한 것들의 잔악한 숨결!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잠꼬대
잠꼬대― 너무 깊고 너무 슬프고 그리고 무섭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잡념
잡념 레퍼터리, 천당을 가까이 잡념 레퍼터리, 지옥을 가까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나도 모르게 잡념인가 봐
그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기고 저절로 꺼지고 출입이 자재(自在)하니
그다지 스스로 있는 걸 어찌 좋다 하지 않으리오, 잡념의 볼기짝이여 잡념의 귀싸대기여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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