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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덕규 시인 / 무의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8.

박덕규 시인 / 무의미

 

 

못 알아

들으시겠다구요?

 

말을 삼킨

 

바람 불고

눈발 날린 건데요.

 

당신의 굳은

얼굴 때문인걸요

 

 


 

 

박덕규 시인 / 미궁

 

 

그 일이 일어났다

그는 동네의 거물이었다

그는 육교 계단을 오르다 쓰러졌다

그 일은 미궁에 빠지고 있었다

 

그를 호위하던 후배들은

근처 소리사의 갑작스런 음악 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고 했다 소리사 주인은

정체 불명의 한 손님이 볼륨을 좀 더 높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볼륨을 다시 줄일 때 손님과 더불어

육교 아래 쓰러져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문방구 주인은 아이들이 신종 볼펜을 달라는 아우성 때문에

오락실 주인은 요란한 전자 곤충 전쟁 때문에 각각

앰뷸런스가 온 다음에야 그 일을 알았다고 했다

자전거상 주인은 낮잠을 자다가 도둑이 든 줄 알고

벌떡 일어났다고 했다

 

많은 목격자들은

어떤 사내 둘이 그를 밀치고는 시내 버스를 뛰어 올랐다고 했다

그런데 두어 행인은

호위 후배들이 그를 뒤로 당겨 쓰러뜨린 다음

시치미를 떼고 있다고 격분했다

한 행인은 그가 발을 헛디뎠으며

그 무렵 돌 하나가 그를 향해 날아 가고 있었으나

맞은 것 같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는 시립 병원으로 옮겨진 후 말도 못하고

마지막 순간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하나를 허공에 그리다가

숨졌다 추리 소설 독자 협회에 가입했던 한 소년이

그것은 여자를 상징하는 기호일 수도 있고

사랑 마크의 오기일 수도 있다고 해

연정에 얽힌 죽음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남발했다

 

뇌진탕이라고 레지던트들은 입을 모았으나

누구에게 떠밀렸던 흔적은 없고 단지 입원 직후

양복 저고리 윗단추가 떨어질 듯 달려 있었다고 했으며

그의 치아를 담당해온 치과 대학 본과 1년생 과대표는

충치의 아픔 때문에 난간을 잡았던 손을 놓았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 행인이 흥분했다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을종 여관에 투숙중인 운명 철학자는 말했다

그는 생체 리듬 사이클의 하강 기간이었던 듯해요

한 동네 유지가 말했다 그는 뛰어난 순수 민간 거물이었지요

동네 막강한 실권자가 말했다 내가 그에게

그 육교를 오르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유가족들은 말했다 동네를 위하시다 가셨어요

골목 치안 담당은 말했다 당시 치안은 완벽했으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

골목 검찰 담당은 말했다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겠다

구내 방송은 말했다 검찰측에서

제 3의 목격자를 숨기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르포 작가 지망생은 말했다 이 일은

지난번 지하도 사건에 이은 제2의 의혹 사건이다

 

그 일은 미궁에 빠졌다

미궁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한까지 미궁이었다

 

미침내 한 지식인이 그 일의 전모를 밝혀냈을 때

그 일은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아무 출판사도 그 진실을 제작하지 않았다

그 진실은 이 시의 주제와도 상관 없으므로 더 이상

언급을 회피하겠다 이번에는

 

공중에서 또 하나의 일이 발생했다

뒷마을 거물의 사고였다

그 일은 미궁에 빠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궁 안팎으로 몰려들었다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소설가)

1958년, 경북 안동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0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아름다운 사냥>, <골목을 나는 나비> 등. 2005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2014.1 한국문예창작아카데미 회장. 1982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 1982 중앙일보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 1992 편운문학상 수상. 2001 제14회 경희문학상 소설부문 수상. 2015.5 제30화 이상화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