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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하석 시인 / 강변 유원지 1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8.

이하석 시인 / 강변 유원지 1

 

 

강물에 반쯤 몸 담그고, 사이다 병은 주둥이 속으로

속의 작고 깊은 하늘을 내보인다.

햇빛 속에서, 병 속의 물과 강물은 같이 썩는다.

물결이 뜨거운 모래를 적시며 기어올라

깡통 하나를 물 밖으로 밀어낸다.

붉은 녹물을 흘리며, 깡통에는 몇 개의 이즈러진 글자와 숫자가 지워지고 있다.

사랑의 표시일까, 그것을 이젠 해독할 수 없다.

 

엉겅퀴꽃 그늘에 숨어들던 눈을 치뜨고

여자는 발로 모래를 헤집으면서,

강가에 선 남자의 맨발을 눈부시게 바라본다.

남자 양말 구겨져 던져진 모래밭 위,

여자의 그림자가 짧게 흔들린다.

햇빛 속에서 남자의 발 밑에서 강물은 뒤척인다.

아지랭이로 뜨거움은 피어오르고.

대여섯 명의 남녀의 웃음이 어우러져

피어오르는 술집. 탁자 밑으로 구두와 하이힐은

부딪치고 여자들의 스타킹은 구겨진다.

소주와 사이다와 콜라 사이를 지글대며

솟아오르는 돼지고기 구이 연기 속으로 마릴린 몬로의

젖은 거대한 입술이 보인다.

낙서로 얼룩진 입술은 찢어져, 그 구멍 속으로 먼지 낀 유리창 밖

두 남녀가 모래의 아지랭이 속에서 흔들리며

맨발로 만나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가슴을 지나 싸구려 여인숙이 보이고,

강물의 더러운 깊이 속,

어딘가에서 새어나오는 혼곤한 신음 소리가

들린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이하석 시인 / 고추잠자리

 

 

그가 날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 여린, 모든 설명과 죄악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그가

문득 내 앞에 나타났다고.

이 턱없는, 아슬아슬한,

사랑이 실은 나의 힘이다.

내가 사는 도시의 미세하게 얽어짜인 미궁들을 비켜서

그만이 아는 미로의 해답을 더듬어서

그가 내게 왔다.

            그 길은

            내가 가보고 싶었던 길

 

그를 붙잡으려고 볼펜을 놓다가 밀린 서류를 챙기느라 나는 또 깜빡 빠져든다. 아침에 샤워한 등이 에어콘 기운에 닿아 무감각해진다.

그는 붉은 섬광처럼

내 서류 위에 날개 그늘을 드리운 다음

찬바람에 떠밀려 방음의 천정을 휘젓다가

창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누가 문을 연 실수를 범했나보다.

 

누가 투덜대며 문을 닫는 소리에 바깥에서 침입하던 소리들이 끊겨, 나는 잠시 멍한 적막 속에 빠져든다.

내 주위에서 몇 사람이 황급히 서류 속에 몸을 숨기는 게 느껴진다. 나보다 먼저 그를 본 이들임을 알겠다. 그들은 창밖의 가볍고 투명한 날개의 침입자들을 잠시나마 은밀히 지켜보았겠지.

그러나, 다행히, 그는 문 닫기 전에 빠져나갔고

그래, 그는 내게 왔다가, 문득, 가버렸다.

                그는 잘 돌아갔을까

                왔던 길을 되짚어서

 

실바람처럼

 

그가 간 길을 나는 헤아리지 못하지만,

타이피스트 김양은, 지난 주말에 산에 갔다가

폭우를 만나 숲에서 허둥댔는데

그것들이 나뭇잎 뒤에 실바람처럼

붙어 있더라고 말한다.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이하석 시인 / 교통사고

 

 

차가, 달려온다. 그의 몸은, 멈칫,

솟구치고, 순간, 모든 시선을 팽개치며,

내동댕이쳐진다. 그의 팔은 꺾이고,

찢어진 채, 나부끼는 옷조각들, 화학섬유 가벼이

무늬를 흩이며 난다. 급한 브레이크로

뜨겁게 정지한 채 멍해진 바퀴 밑,

몇 개의 돌들은 튀어오르며, 긴장된

그의 가슴을 쥐어박는다. 젠장, 신, 세, 조졌군, 하고

운전수가 투덜거릴 때, 그의 구두는 황급히

하수구로 뛰어들고, 그의 반짝이는

단추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급히

차들을 세운다. 그의 주민등록증은 무표정한

얼굴 하나를 경찰관의 발 앞에, 내동댕이

친다. 경찰관은 갑자기 분노해서, 그를 노려보면서,

차를 걷어찬다. 부서진 유리창 속에 경찰관의

얼굴이 어둡게 비친다. 사람들은, 웅성대며,

그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유리창을 떠나 부서졌고,

경찰관은 호각을 불어, 그의 죽음을,

확인한다. 그의 피는 부서진 차의 기름과

녹물에 엉기면서, 고즈넉히, 또는 급히,

땅 속으로 스며든다, 경찰관도 그도

아무도 모르게.

 

그가 실려서 어디론가 떠난 후,

도로 인부는 그의 피부터 흙으로 덮는다.

크레인으로 들어올려져 차도 떠나고,

사람들도 흩어진 후, 비로소 인부는 담배를 피워 물며,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길에서

주운 몇 개의 단추는 먼지와 흙을 닦은 후

얼른 주머니에 챙긴다. 하수구에서 주운

두 쪽의 구두를 인부는 제 신과 바꿔

신는다. 푸른 유리조각이 인부의 빗자루에 쓸려

길가 풀덤불 속에 버려질 때,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핏물이 유리에 묻어 급히 흙속으로

숨는다. 향기로운 풀잎 그윽한 오월의 정오를

인부는 나른히 그 곳을 곧 떠나간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이하석 시인(기자)

1948년 경북 고령군 출생. 전쟁 직후인 1953년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한 그는 대명동 난민촌 언저리에서 자람.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971년 '현대시학' 등단. 1978 영남일보 기자. 1980 대구매일신문 편집국 문화부 기자. 2005 영남일보 논설실 실장. 시집『투명한 속』(1980) · 『김씨의 옆 얼굴』(1984) · 『우리 낯선 사람들』(1989) · 『측백나무 울타리』(1992) · 『금요일엔 먼 데를 본다』(1996) 등을 냈다. 1990 제9회 김수영문학상. 1990 도천문학상. 1992 제4회 김달진문학상. 1996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