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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승현 시인 / 순록이 있는 초원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8.

서승현 시인 / 순록이 있는 초원

 

 

 흰 용담꽃 핀 산 너머, 아홉 살 소녀에게 사탕을 전하러 가는 열한 살 소년, 초원 사람들을 영원으로 안내한다는 흰뿔순록의 황금빛 구리방울소리가 차고 맑은 공기를 잘랑잘랑 가른다. 전생의 연인을 찾아가는 산자락 오솔길은 연푸르고 조용하다. 먼 길을 걸어 오르츠 천막 찾아 온 순례자 앞에 누군가 갖다 놓은 분홍 술패랭이꽃 한 다발, 볼 붉은 소년은 타고 온 순록의 귀에 살며시 꽃 한송이 꽂아준다. 들꽃의 향기에 잠시 취한 듯 새하얀 뭉게구름 서늘히 그림자 드리워 주는 고산지대 호숫가. 전생이 수도사였던 어린 소년은 천년고목의 텅 빈 듯한 목소리로 바람의 음률을 불러들인다. 오래된 어린 연인을 바라보며 호젓하게 풀어내는 긴 노랫가락, 하늘과 땅을 둥글게 돌아 소녀의 검은 눈동자 속으로 스며든다. 순록이 인도하는 영원함은 어린 연인의 맞잡은 손끝으로 또 다시 이어지고 술패랭이 분홍꽃잎은 흰구름의 등 위로 오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영원을 향해 걷는 순례자였다.

 

웹진 『시인광장』 2020년 2월호 발표

 

 


 

서승현 시인

강원도 태백에서 출생. 광주대 문창과 석사 졸업, 전남대 국문학과, 동신대 한국어교원학과 박사 졸업. 2001년 《시와사람》시 신인상 등단, 2019년 《시와사람》 평론 등단. 시집으로 『푸른현호색꽃 성채에 들다』 등이 있음. 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광주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동신대·방송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