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태일 시인 / 발바닥 밑에
내가 허물없이 딛는 곳곳에는 쇠붙이들이 늘 잠깨어 있다. 발바닥이 근질거리는 걸로 보아 안다.
쇠스랑 부러진 것, 낫 부러진 것, 엠원소총 녹아난 것, 대포 문드러진 것, 비행기 찢어진 것, 식칼 부러진 것, 금니빨, 은니빨, 귀고리, 코걸이 등등……
모두들 한 번씩은 울었던 피와 함께 고스란히 깨어 있다. 쉴새없는 음성이며 우리들의 엄청난 오해들은 깨어 있다.
시퍼런 녹들을 두리두리 두르고 이슬도 햇빛도 독약 마시듯 마시고 무슨 일인지 고스란히 깨어 있다.
어린 시절에 내가 부러뜨린 누님의 머리핀도, 어메의 옷핀도, 내가 허물없이 딛는 곳곳에 내 발바닥이 그리운지 보물처럼 눈뜨고 있다.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조태일 시인 / 방문기(訪問記)
작은 시도(試圖)를 들고 들어 가 반가운 방의 유순한 짐승 앞에 경건히 앉았다.
우리들의 진행은 한갓 침묵 사이에 황홀히 미끄러져 내리고 황홀히 흩날리는 것이 있다. 너의 가파른 메니큐어의 비탈에서 어깨 너머에서 끝내 야합을 거부하던 늠름한 세대의 호흡들.
눈길을 돌려라. 기상하는 것들의 높이만큼, 그들의 가슴 깊이. 테이블 위엔 진리의 강한 털이 방안엔 일체의 원인들이 남아 늙어 가고 우리들의 눈 속엔 결론이 흐느낀다.
단거리 선수들은 그 코스에 뒹구는 햇살들을 거칠게 살해하고도 스파이크에 묻어나는 팔다리에 엉키는 욕망을 세우고, 시간들을 밀치며 달린다. 성급한 목적은 바로 눈앞에…… 나의 안식은 보다 더 강한 공격 너의 안식은 보다 더 조용한 방어.
나의 눈길은 정확히 날쌔인 욕망으로 저 구석의 다정한 신(神)을 잡았다. 흩어진 방은 거만한 `즈로즈' 남자의 난해한 유혹이 살고 유괴된 지성이 눈 뜬다. 그러나 이해된 세계 안에선 한 마디 목마른 선언!
우리들은 서로 열전하는 병정. 장악하고 패(敗)하고 쓰러지면서 이 살벌한 일순(一瞬)을 피워 물면 타협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방은 과감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침 선박, 선명문화사, 1965
조태일 시인 / 빈 집에 황소가
돼지꿈이나 한번 꾸었으면 하던 그 꿈마저 찢기고 빼앗긴 채 우두커니 서서, 멀거니 서서, 빈집에 뿔 꺾인 황소 들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빈집에 웬놈의 먹을 것이 있겠는가. 이 병신아 사람이 살아야 찌꺼기도 있지 않겠는가, 이 병신아.
빈 솥뚜껑이나 핥고 불꺼진 잿더미나 뒤집다가 나오는 뿔 꺾인 황소를 본다.
주인은 어디 갔는가, 누가 훔쳐 갔는가, 누가 소리도 없이 죽여 버렸는가. 이 병신아, 니가 안 죽였나! 니가 안 죽였어?
살다 보니 눈 코 입 귀 살갗 등등이 다 병신이 되겠네.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조태일 시인 / 빗속을 거닐며
햇살보다 더 찬란한 빛이다. 햇살을 헤치며 거닐다가 소나기를 만나 빗속을 거닐어도 우산을 받치지 말자.
온몸이 젖는다 해도 오늘 하루가 다 젖는 것은 아니다. 침묵들을 들쑤시는 전령이니까 깨우침이니까 소나기는
온세상을 두루 돌고 온 열사들의 마음인지 화살로 몸을 파고드는구나. 노여움으로 사랑으로 종철이의 한열이의 영혼이 내리쏟는구나. 우리들의 곁을 떠난 열정의 시인 채광석의 마음이 내리쏟는구나.
빗속을 거닐면서 휘청이지 말자 지쳐 드러누운 아스팔트를 뚫고 시멘트길을 뚫고 무엇이 그리 그리운지 흙덩이가 용솟음친다. 싹들도 다투어 솟아난다. 땅 속 깊이 묻혔던 소문들도 빗줄기로 물구나무 선다.
비에 젖어 화살에 부활하여 한 마음으로 파도 치는 우리들이여 우산을 받치지 말자.
산속에서 꽃속에서, 창작과비평사, 1991
|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하석 시인 / 강변 유원지 1 외 2편 (0) | 2020.05.18 |
|---|---|
| 박덕규 시인 / 무의미 외 1편 (0) | 2020.05.18 |
| 정현종 시인 / 잎 하나로 외 5편 (0) | 2020.05.18 |
| 박재삼 시인 / 어지러운 혼(魂) 외 4편 (0) | 2020.05.18 |
| 이종섶 시인 / 립서비스센터 외 1편 (0) | 2020.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