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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재삼 시인 / 옹기전에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9.

박재삼 시인 / 옹기전에는

 

 

옹기전에는

안개다

가랑비다

해질녘 어둠이다.

 

된장 고추장 냄새가

아련한 창호지 가에 비치듯

밀양박씨(密陽朴氏) 어느 한 파(派)의

그 중의 한 집안이

죽지 못해 죽지 못해

억울하게 귀양살이하며

고향을 생각는고나.

 

년의 바람, 민음사, 1975

 

 


 

 

박재삼 시인 /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江)을 처음 보것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원한(怨恨)

 

 

아무리 사람이 항상 꽃핀 것만 바라

놀고 사는 게 아니라 한들

 

안 그런가, 삼베 올날 안 고르기

그보다도 못하게야 살아서 되리.

 

그러나 그 삼베올날 밑에는

비오는 날씨의 우리네 살점

 

오백년(五百年) 정(情) 떨어지게

한정없이 맞고 한정없이 빌고

 

겨우 한뼘짜리 간장(肝臟)밭이나

근근히 소작(小作)하고 살았던가.

 

시절(時節)이 좋을쏜

굶고 울고 굶고 울고

 

그중에 벼락 안맞고 날 보낸 걸

어진 제왕(帝王)님 덕(德)이라 하였던가.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은행잎 감상(感傷)

 

 

내 열병(熱病)도 가실 겸

지난번 고향길에는

금융조합(金融組合) 뒷뜰에 가

은행잎을 보면서 새 눈물을 배웠네.

 

은행잎을 줍던 날 밤은

돈을 줍던 꿈으로

홀로 쓸쓸한 소학생(小學生)이었던가.

 

은행 한잎을

수신(修身)책에 꽂고서

돈생각이 나을까

공부생각이 나을까.

 

나는 선생님 앞에

많은 아이와 함께 은행잎 되어

자꾸자꾸 손을 드는 것이다.

녜, 녜, 녜, 녜, 녜……

 

황금의 눈물을

가을 땅바닥에 지우며 나는 섰어라.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박재삼 시인 / 일월(日月) 속에서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마가 한결 빛나고

강물은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편일률(千篇一律)로 똑같은

쳇바퀴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찬란한 미지수, 오상사, 1986

 

 


 

박재삼 (朴在森. 1933년-1997년) 시인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1996 제4회 한국공간시인상 심사위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