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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일 시인 / 산(山)에서
나는 늘 홀로였다. 싸움은 많았지만 승리는 늘 남의 것이고 남는 패배는 늘 내 것이었다.
배낭을 벗어 바위 곁에 놓고 신발을 벗는다, 양말을 벗는다. 좔좔 흐르는 물에 죄 많은 손발을 씻어내자 시리도록 시리도록 씻어내자.
고량주(高粱酒)를 한 모금 빤다. 솔직하고 빠르게 폐부(肺腑)를 들쑤신다.
드디어 시야가 막히고 내 몸엔 검붉은 불이 붙는다. 검붉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아서라 태일아, 해가 진다, 해가 진다, 어서 일어나거라" 아버님 목소리가 활활 타오르고, 눈물이 핑그르르 발등을 친다. 눈물이 핑그르르 발등을 친다.
앞산 뒷산 옆산이 다투어 다가서고 낙엽들은 내 옆에서 흩날리다 지고 산(山)들이 조이니깐 하늘은 위로만 위로만 삐져나와 치솟는다.
고랑주 한 모금에 담배 한 모금, 한 모금 빨아 머리 위로 날리고, 한 모금 빨아 앞뒷옆산에 날리고 한 모금 빨아 물 위로 날리고……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조태일 시인 / 석탄
참나무 숨결이 파도치는 두 어깨며 지나치게 이글대는 두 눈망울, 온몸을 철조망 같은 심줄로 무장하고 도계탄광서 온 그 사내와 만나던 날 눈에 핀 다래끼여 터져 버려라 터져 버려라 다래끼여, 폭음을 했다.
이 조가(趙哥)야, 그 거창한 체구엔 노동을 하는 게 썩 어울리겠는데 시(詩)를 쓴다니 허허허 우습다, 조가(趙哥)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는 갑다고 회색 바바리코트 사줄 테니 시인(詩人)폼 내라고 왜 그리 못생겨 울퉁불퉁하냐고 악쓰고 힘쓰고 힘뱉고 악뱉고 있을 때
한민족(韓民族)의 거구(巨軀)요 표준을 넘는 미남(美男)은 검다 검다 지쳐 흰빛도 튀기는 새카만 석탄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새카만 석탄이 되고 있었다.
맨 밑바닥에서 서러우나 즐거우나 언제 어디를 안 가리고 솟구치고 꿈틀거리는 석탄이 되어서 한민족(韓民族)의 거구요, 미남인 나는 꺼멓게 꺼멓게 울고 있었다.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조태일 시인 / 소나기의 혼(魂)
이렇게들 살다가 저렇게들 살다가 사람은 그렇게들 살다가 자손들일랑 땅에 남겨두고 보이지 않는 혼(魂)이 되고 혼은 거듭 살아서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마른 하늘로 목이 타면 구름 속으로 사알짝 끼어 들었다가 땅 위의 일들을 그리워하다가 언짢아하다가 드디어 구름을 충동질하다가
벼락 한 방이면 작살날 애들이 번개 한 방이면 눈멀 애들이 꼴도 좋게 육갑지랄들 한다, 어쩌고 한바탕 칭얼대다가 까무라치다가 구름 속에서 그렇게 살다가 보채다가 죽어서 쏜살같이 소나기가 되고 소나기는 거듭 살아서 땅 위에 길게 꽂힌 깃발이 되고 참 오랜만에 듣는 소문이 된다. 믿어 의심치 못 할 아우성이 된다.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조태일 시인 / 소리들 분노한다
소리들 분노한다. 겨울 되니 부산했던 깃발 모두 내려지고 펄럭이던 그 소리만 세상에 가득 떠돌며 분노한다.
눈보라치는 기세로 매서운 폭풍으로 헐벗은 나뭇가지를 맴돌다가 푸른 하늘이 그리워 치솟았다가 보드라운 눈송이로 내려와 나뭇가지 위에 휴전(休戰)처럼 무덤처럼 앉는다.
앉아서 침묵으로 침묵을 듣는다. 소리로 소리를 듣는다. 홀로 떨고 있는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며 안에서 물 오르는 소리 나부끼는 깃발소리 듣는다.
우리들 내부 가득 끓어오르는 사랑의 소리들 그 소리를 분노하며 듣는다.
가거도, 창작과비평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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