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덕규 시인 / 바캉스
방학이 되자 바다로 가겠다는 애인을 배낭 속에 처넣고 산으로 오른다 야호오호오― 누군가의 메아리가 달려 와 내 가슴 벽에 부딪쳤다 되돌아간다, 일단 한번 바다로 가 보재니깐요 배낭 속에서 투덜거리는 애인을 묵살하고 산에 산에
오른다 애인은 배를 타고 멀리 나가고 싶어한다 배를 세내자면 돈이 많이 들지 않느냐 그래도 애인은 볼멘 소리다, 일단 한번 바다로 가 보재니까…… 네 몸매를 자랑하고 싶은 게로구나, 그래도…… 니가 무슨 자유와 꿈을 사랑하는 진보주의자라고, 그래도 바다로…… 니가 무슨 원형 이론에 불타는 회귀성 시인이라고, 그래도 이 갈구를 무시하실 수야……, 놀고 있네
말뚝을 박고 텐트를 칠 때에도 애인은 음질 나쁜 녹음 테이프처럼 찌직거리며 고장난 젖꼭지처럼 졸졸 불만투성이 애인은 바다 바다 바다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는 법, 애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어헛헛 웃어도 애인은 입술을 깨물고 그 입술 선정적으로 물들 때까지 나는 그윽히 하늘과 구름과 산 사이로 벌레 울음 새 울음 사이로 눈알을 굴리는데 애인의 어깨는 어느새 그 바다 물결 물결 흐느끼어서
이 유익한 방학 기간에 신경질이 나서 애인을 배낭 속에 쑤셔 넣고 산을 내려 온다 이젠 휘파람도 메아리도 없는 길 애인은 언제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고 싶어한다 확 벼랑에 던져 놓는다 위협하여도 애인은 자꾸 멀리멀리 나가고 싶어한다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 / 봄 햇살
여린 꽃대궁마다 남쪽 바람 손잡고 봄마실 가던 길목
잔뜩 심술난 동장군에게 꼬집혀 잉잉 울고 있을 때
눈물 닦아주며 아픈 곳 어루만져주는 할머니의 약손
박덕규 시인 / 비둘기와 손
부질없는 짓이다. 새를 내 손 안에 가두어 두는 일.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새의 안녕을 비는 일.
그러나 새는 떠나가지. 안녕, 하고 손을 흔들면서 창공 가득 날아 오르지.
새는 날아도 그 천상의 영역이 있다. 바람의 저항을 지나면 지날수록 아름다운 비상의 행로를 버리게 된다. 새의 가슴이 눈비에 젖어 만리 밖에서 겨울을 맞는다. 어쩌면 구원은 여기에 있을까. 새는 빈 뼈 마디마디 고심에 찬다.
부질없는 짓이다. 아득히 끝없이 날아 오른다는 것. 마치 영원으로 가는 것처럼 너훌너훌 그 하염없는 일.
때때로 새는 내 손 안에 감추어지기를 희망하였다. 내 손 안 따뜻한 주말 오후에 깃을 내리고 공원 곳곳의 피는 봄을 보아라.
내 손 가득 평화 위에 새를 세우고 새와 나의 안녕을 노래부를 때 비로소 새는 자유처럼 떠난다.
나는 언제나 새를 부르고 안녕, 하고 손을 흔들며 영원으로 새는 떠나고 이제 손 안에 아득히 끝없이 날아서 온다.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최문자 시인 / 청춘 2 (0) | 2020.05.19 |
|---|---|
| 이하석 시인 / 기지촌 외 2편 (0) | 2020.05.19 |
| 조태일 시인 / 산(山)에서 외 3편 (0) | 2020.05.19 |
| 정현종 시인 /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외 5편 (0) | 2020.05.19 |
| 박재삼 시인 / 옹기전에는 외 4편 (0) | 2020.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