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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시인 / 기지촌
공군 기지의 꿩들과 참새들은 숲속에 숨어서 지저귄다, 숲 위 하늘엔 인간들의 무수한 길들이 누워 있고. 나무들이 낮게 엎드린 사이로 활주로도 길게 예리한 굉음의 길로 누워 있다. 잔디의 발뿌리가 닿지 못하는 흰 페인트 길에 번쩍이는 햇빛.
폭탄을 적재한 비행기들은 정확하게 하늘 길을 안다. 하느님도 연들이 가는 꿈나라도 없이 하늘은 높고 푸르다고, 기지촌 아이들은 모형 비행기 놀이 속에서 느낀다. 꿩 울음 소리로 봄이 와서 아이들의 신발에 닿아 잔디의 발뿌리가 또 근지럽다.
꿩을 찾아 숲속에 들어간 아이들은 잡초 속 꿩의 길에 누워 있는 타이어 조각과 병 조각들 빈 깡통 무더기 속에 부서진 거울 한 쪽이 떨어져 흙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아이가 쓱 손가락으로 먼지를 닦으니, 거울 속 아이의 손가락이 지나간 쪽으로 비행기도 길도 없는 하늘이 한 쪽 문득 푸르게 비쳐 왔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 / 김씨의 옆 얼굴
은사시나뭇잎 그늘이 얼룩져 그의 얼굴은 어둡고 술 취한 듯하다. 육교 밑으로 휴지를 쓸어갈 때 발 밑을 구르는 신문지 조각을 때로 주워 읽는다. 길 가, 인도와 차도를 가로지른 철제 난간에 앉아, 그는 먼지 속처럼 아득히 버마 사건의 그 후와 최근의 학원 사태를 느낀다. 그것들은 그의 코 언저리를 붉게 하고 깊은 줄이 패인 이마를 불룩거리게 한다.
청소가 끝날 때 쯤, 그의 귀 언저리 털에서 이 거리의 마지막 먼지가 부스스 떨어진다. 중앙로의 오늘 그가 맡은 구간은 은사시나무 길, 비와 바람과 불빛과 사람들이 자주 흐르는. 50이 넘어서면서 자꾸 허리가 결리고, 그의 목뼈를 주먹으로 자주 두드린다. 신문엔 안 났지만, 레이건이 중공을 방문하기 직전에 그랬을 것처럼, 때로 그는 자, 신나는 일이 있을 꺼야 하고 중얼거린다. 그걸 위해 그의 눈길이 자식들의 얼굴처럼 생긴 노변의 햇수박 쪽으로도 자주 간다. 은사시나뭇잎 그늘이 거기에도 얼룩져 있다.
육교 옆, 미도 백화점의 셔터가 올라가자 큰 유리창에 이내 김씨의 빈 얼굴이 비친다. 때로 밝게 때로 어둡게 때로 앞 모습만 그 숙인 얼굴이 하루종일 유리창에 맑은 유리창 속 아름다운 온갖 상품들 위에 비친다. 밤 11시 철제 셔터가 내려진 후에도 그의 얼굴이 철제 셔터의 위에 완강하게 비친다. 어둡게 또는 새하얗게. 헌 신문지 같은, 또는 은사시나뭇잎 같은, 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철제 셔터 같은 얼굴이 거기에 있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이하석 시인 / 깡통 1
풀숲 빈 깡통들은 모여서 흩어지면서, 쉬 녹슬어 버리는 자신들과 헤어지려고 애쓰면서, 스스로 무거워지는 몸을 스스로 자꾸만 비우면서, 자신들이 누운 곳을 언제나 빈 터로 만들어 버린다, 봄 오는 연탄재 더미 속 연탄재를 또 한 번 부서뜨려 놓으면서. 풀꿈의 고통 속 초록은 무성해지고 깡통 속 그 그늘들은 드리워진다. 달개비꽃 피는 양지쪽으로 뻗는 풀의 발가락 황홀할 때 깡통들은 달개비의 햇빛을 날카로운 이빨로 벗겨 놓으면서 더욱 무거워지는 몸을 또 몇 번이나 비운다.
아름답다고말해줄까달개비야 내가벼운몸뿐으로는 네이름도그이상의무엇도감당할수없군
몸뿐이라는 깡통의 말에 달개비는 수줍게 웃는다, 깡통을 벗어나려는 고통 뒤에 스스로의 몸을 감추면서. 깡통들은 은연중 그 수줍음에 걸려 투명해져 버린다, 무게가 없는 몸을 풀의 고통 위에 띄우며.
웃지마라달개비야네수줍음뒤켠의더깊은어둠에비쳐내몸이나타나는구나내몸은앙상하구나그러나저어둠을욕해선안된다달개비야인간인저어둠에비쳐우리는나타나는것우리는어차피인간의편이지만지금은시들어버려진몸그러나너는수줍음만끝내보일뿐우리를받아주지않고지금은우리들만으로떠돌뿐인몸들을자꾸비워낼뿐
지금은이라는 자신의 말에 깡통은 수그러지며 쭈그러든다. 지금은 쭈그러들 뿐이야, 깊숙하고 더욱 차가운 쪽으로 빠져들며, 모든 것을 제 자신이 헐어 버리며, 팽개쳐진 몸의 마음도 팽개치면서.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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