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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시인 / 어떤 소극장
극장 안은 어두웠다 계단을 따라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 나는 뒤에서 두 번째 줄 끝에 앉았다 무대엔 백발의 한 노인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휠체어 앞에는 나무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투명유리 찻잔에서 김이 올라왔다 테이블 맞은편엔 절망에 빠진 한 남자가 보였고 백지에 어두운 유서를 쓰고 있었다 흐린 핀 조명 아래서 노인은 자신이 살아온 진흙과 유리의 날들을 이야기하며 절망에 빠진 남자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 말게 자넨 오늘밤 죽지 않을 거네! 벽 너머에서 파도소리가 들려왔고 조명이 밝아지면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여든 살의 나였다 남자는 마흔일곱 살의 나였고 무대 왼쪽에서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무대 오른쪽으로 지나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난 금방 알아챘다 그 아이는 열한 살의 나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걸어 나갔다 내가 등장하자 절망에 빠진 남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구겨진 유서를 손에 움켜쥔 채 내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무슨 일을 하시오? 시를 쓰는 서른 살 청년입니다 목숨을 걸 작정입니다 확신에 찬 내 대답에 남자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벽 너머 수평선만 바라보았고 극장은 둥둥 떠가는 거대한 눈동자였다 무대 오른쪽에서 자전거 탄 아이 둘이 나오더니 깔깔깔 떠들며 무대 왼쪽으로 사라졌다
계간『모:든시』 2019년 겨울호 발표
함기석 시인 / 광야
시인아, 파도를 노래하지 말고 흰 종이 속에서 검푸른 파도가 솟구치게 하라
백지는 근육체고 핏줄다발이고 숨 쉬는 광야이니 형용사의 숨통을 조여라
이 숭고한 명사, 하늘은 찢어 앞치마로 써라 이 독재자 명사, 혀는 찢어 흩날려라
보라! 죽은 고양이 눈동자에 내리는 햇빛 보라! 인간이 망친 땅을 뚫고 날아오르는 새싹들
어떤 시는 빛이고 새, 인간의 갇힌 꿈을 찢고 살을 찢어 심장을 꺼내는 사자
시인아, 사자를 가두어 사육하지 말고 갈기 무성한 사자가 사납게 광야를 달리게 하라
계간『모:든시』 2019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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