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문자 시인 / 청춘 2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9.

최문자 시인 / 청춘

 

 

  파랗게 쓰지 못해도 나는 늘 안녕하다

  안녕 직전까지 달콤하게 여전히 눈과 귀가 돋아나고 누군가를 오래오래

  사랑한

  시인으로 안녕하다

  이것 저것 다 지나간 재투성이 언어도 안녕하다

 

  삼각지에서 6호선 갈아타고 고대병원 가는 길

  옆자리 청년은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을 읽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청년이 파랗게 보였다

  연두넝쿨처럼 홀쩍 웃자란 청춘

  우린 나란히 앉았지만 피아노 하얀 건반 두 옥타브나 건너 뛴다

  난삽한 청춘의 형식이 싸락눈처럼 펄럭이며 나를 지나 가는 중이다

 

  안녕 속은 하얗다

  난 가만히 있는데

  다들 모르겠지

 

  한 부분에 정신 없이 늘어나는 눈물

  구르지 않고 사는 혀

  아무도 엿보지 않는데

  그렇게나 많이 나를 증명할 필요가 있나

 

  가방 속에 읽다 만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꺼내 나도 읽고 싶었지만

  그냥 있었다

  모두들 나를 두고 그냥 내렸다

  청년도 나를 잊고 그냥 내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설마, 하던 청춘이 일어나서 나를 열고 그냥 나갔다

  고대 앞에서 들뢰즈를 들고 내릴 때

  사람들이 하얀색으로 흔들리는 내 등을 보고 있었다

 

계간 『문학청춘』 2014년 겨울호 발표

 

 


 

최문자 시인

1947년 서울에서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졸업. 현대문학 박사. 저서로는 시집으로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등과 그밖의 저서로는 『시창작 이론과 실제』『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사상의 상징적 해석』등 다수가 있음. 협성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및 제6대 협성대학교 총장 역임. 2008년 제3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2009년 제1회 한송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