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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령 시인 / 삼국유사 사랑 서사시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9.

삼국유사 서사시 제1장 배경설명

 

[백률사栢栗寺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흥법3 원종흥법염촉멸신原宗興法猒髑滅身조에 나오는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절, 불교공인을 위해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이 순교를 자청하였고 그의 목을 치자 흰 피가 솟구쳐 소금강산에 떨어졌다. 자추사刺楸寺라 불림, 절의 진입로에는 대나무 숲이 있다. 대나무는 풀이면서 나무이며 꽃이 피기까지 약 76년이 걸리고 한 나무의 꽃이 피면 숲 전체가 따라 꽃을 피운다]

 

 

이령 시인 / 삼국유사 사랑 서사시

ㅡ 백률사에서

 

 

1

 

  누구의 피울음인가 꽃 비경 덧널처럼 쌓이는 대숲, 땅속 금강이 일제히 솟구치니 내 귀, 천년 서루에 올랐다 내린다. 소름 돋는 저잣거리 원성을 말아 쥔 북악산 솔이끼며 귀신새 소리마저 이곳에선 하얗게 날이 선다.

 

만파식적 듣고 자란 서라벌 백률송순, 황룡이 승천하듯 굽이굽이 내달린 곳, 자추사 흰 피도 찰나에 피고 찰나에 지는 줄 그 누가 알았을까?

 

2

 

대(竹), 풀이면서 나무요, 한꺼번에 피고 지기까지 장엄하면서도 소담스러워, 기품 있는 죽음이요, 생이다.

 

나는 이미 세상의 화려함이 싫어진지 오래다

나쁘게 태어나 짐승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오!

음악으로 세상을 다스리라던 법민의 말씀

해룡이 된 대왕의 넋이 날아와 앉은 11면 6비 탑신 너머

지금 천년을 사르는 꽃불 경전 그윽하다

귀로부터의 자유가 귀로부터 전해오니

현생의 저잣거리 이전투구를 누군들 멈추게 할까

황금도 녹이 쓸고 맞가지 금관이며 굽은 옥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한다며

치렁치렁 대나무 가지마다 귀 드리개가 지천이구나!

풀이면서 나무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이면서 너이려니

귀 닫고 눈 먼 이생의 치정자들이여!

가멸찬 꽃 죽비를 받으시오!

 

3.

 

  바자울 너머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 다그닥다그닥, 수막새에 오르고 하늘이 울렁대듯 메아리치는 도리깻장부, 풍월주의 그 기백이 천년의 주술로 환생한 곳. 날아가는 새도 잠시 쉬어가고 뿌리가 땅에 닿지 않는 부평초가 여전하지만, 화르륵화르륵 쏟아지는 꽃 무덤, 지금 내 귀에 앉은 풍경마다 시간을 거슬러가니 분명 이 곳에선 나무장도 곧 꽃 사태에 들겠구나.

 

감언처럼 달디 단 화주다. 어느 불씨가 저리도 애달플까. 댓잎하나 솔잎하나에도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 사방팔방 기도소리가 시간을 말아 쥐고 피어나니......,

 

4.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니, 만파만파 화평이고, 주령구 내려앉은 월지엔 연꽃이 만발하니 온 고을이 소리에 취했겠다. 굴불사면석불 보일 듯 보일듯한 저 미소가 천마를 타고 하늘을 가르니 이생의 꽃 소리 꽃값을 어디에서 물을까 관음도 꿈이요, 미륵도 꿈 이언데 모래 같은 지금  여기가 바로 극락이요 부처라는 것일까?

 

  5.

 

  네 등 뒤에 꽃을 두는 일은 서사적이다

밤보다 깊은 새벽을 밝히는 현재의 일이다

가고 올 시간의 흔적을 보듬는 일

이별의 비수와 비가를 숨기기엔 이 계절이 너무 짧다

너를 품어 꽃을 피웠지만 자리마다 물컹하다

모든 서사는 지금, 바로지금 서정적으로 완성된다

지나보니 꽃 피고 잎 지나 잎 지고 꽃 피나

무릇무릇 사랑이라 부르던 것들이 죄다 미쁘다

너를 건너왔으니 나를 데려와야지

머리를 버리고 심장을 얻었다, 가벼웠다

흔들리던 날들이 마른 나무에 핀 꽃 순처럼 싱싱하다

울던 별들이 지면 새싹은 움 튼다

네 등 뒤에 꽃을 두고

걸어온 걸어갈 길을 벅차게 걷고 있다

 

계간 『문학의 오늘』 2019년 겨울호 발표

 

 


 

이령 시인

경북 경주에서 출생. 2013년 《시사사》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2015년 한중작가 공동시집 『망각을 거부하며』출간. 시집으로 『시인하다』와 『삼국유사 대서사시』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부주간, 동리목월기념사업회 이사, 경북혁신포용포럼사무국장, 문학동인Volume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