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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채림 시인 / 다시는 악수하지 않아도 좋아요
우리 발가락은 저 높은 나무의 뿌리처럼 늘 벗겨져 있어요. 꼼지락거리면서 서로의 발을 덮어주고 아무리 되뇌어도 낯선 이름을 다시 되뇌어 보는 거예요. 이따금씩 얼굴을 맞대고, 우린 마치 언젠가 한번쯤 만난 사람들 같군요. 저기 저 서러운 표정들이 얼굴을 꼭 붙이고 우리를 지나쳐 가네요.
밤새도록 텁텁한 취향을 나누어 씹는 동안에는 서로의 입 속에 고개를 드밀기도 했어요. 내 입속에서 언젠가 한번쯤 만났던 사람의 냄새가 나나요? 아무도 웃어 보이지 않고, 우리의 재치는 너무 가벼워서 쉽게 배가 고파져요.
쉬지 않고 악수하지 않으면 손이 잘린다는 소문이 있어요.
아무도 악수를 멈추지 않으니, 진실을 아는 건 아주 먼 훗날일 거에요. 나도 이제 내 지문이 궁금한 날들이 많아요. 목소리와 목소리들이 희고 긴 꼬리를 달고 허공으로 날아올라요. 이름들을 부를 때마다 나는 조금씩 지워져가요.
점점 투명해져가는 우리들은 곧 바람에 흩어져버릴 듯 쉬지 않고 조금씩 펄럭이고, 다시 펄럭이고. 낯설게 다시 낯설게 각자의 이름을 다시 한 번만 불러 보기로 해요. 밤이 되면 금세 발이 시려오지만 우리는 저 나무의 가녀린 가지가 좋아서 여기 있는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웹진 『시인광장』2008년 가을호
박채림 시인 / 꽃
온통 그늘이에요, 한줌의 햇볕이 아쉬워서 좋아요. 눈물이 터지듯 툭, 하고 씨앗을 틔워도 바람이 불지 않아요. 창피해서 내 붉은 얼굴이 그냥 시들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기 뒷물한 물을 버리는 여자의 귓가에 어제 꺾인 다알리아가 시든 채로 걸려 있네요. 돌 틈에 벗겨진 발가락 사이로 비린 물이 스며들어요. 내가 진저리를 치며 붉게 붉게 피어올라요. 밤이면 술 취한 여자의 아버지들이 나를 무심히 밟고 지나가요. 허리가 꺾인 채로 시멘트 바닥에 뺨 부빌 때마다 여자의 뒷물냄새가 났어요. 나를 키운 향기에요. 나비 한 마리 내 얼굴에 앉아요. 간지러워서 싫어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뒤채요. 내게도 날카로운 이빨이 필요해요. 저 가벼운 나비의 날개를 물어뜯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술 취한 아버지들의 발목과, 나를 자라게 한 저 따듯한 달의 뺨을 이빨로 짓이겨 버릴 거예요. 아니면, 내 허리를 물어뜯는 건 어떨까요. 붉게 쪼그라든 내 얼굴, 여자의 귓가에 닿았나요? 나는 그냥 혼자 피었어요. 어쩐지 혼자만 흐드러진 내가 창피해서 그냥 시들어 버리는 게 좋겠어요.
웹진 『시인광장』200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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