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조유리 시인 / 로프노르湖*를 찾아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9.

조유리 시인 / 로프노르湖*를 찾아서

 

 

  죽은 호수가 사막을 쏘다녀요, 바짝 탄 숨구멍에서

  조곡 같은 모래바람이 태어나요

  짜고 슬픈, 유적인 나의 호숫가

 

  흐르고 있는 것들은 이승에 잠시 풀어놓은, 계절풍이지.

 

  당신이 훅, 앞가슴을 들춰보였을 때

  까닭없이 매운 고독에 마음을 눌러놓지

  말아야했어요 갈라터진 기억들을 뱉어내는 일기장

  한 번도 따뜻한 피를 수혈 받지 못한 손가락들이 수북하게 찢겨져

  새벽녘마다 길 없는 곳으로 쏟아져요

 

  생의 한 복판으로 흘러가지 못한 것들이

  광막한 지평 끝에서 늙어갈 때

 

  검은 砂丘에 매몰된 당신, 밤이면 잠속으로 흘러와

  밤새 모래알들을 컥컥 뱉어내요

  스무 살 통증이 몰려와 등을 쓸어주려 하면

  검은 모래폭풍이

  바닥 채 쓸어가 버려요 얕아진 바닥이

  바닥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만신창이 된

  꿈에서 필사적으로 깨어나면

  타고 온 막배가 엎지른 호수

 

  당신이, 내 몸 속에 흥건해요

 

*로프노르湖-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누란왕국과 함께 사라진 호수로 사막을 떠돌아다닌다고 함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가을호 발표

 

 


 

 

조유리 시인 / 공용터미널 뒷골목엔 염천(炎川)이 흐른다

 

 

  신탄진 터미널 뒷골목에서

  길을 놓쳤다

  평상이 있는 담뱃가게 모퉁이를 꺾는 순간

  방금 전 누군가 돌아서 나간 골목길이 스멀스멀 물살을 일으킨다

  정박할 곳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내의 뱃머리를 집어삼킨다

 

  부러진 갈빗대를 끌고 와

  새파란 정적이 될 때까지

  물살을 찢고 제 몸을 헹구어

  순한 물짐승이 되어서야 돌아눕는 사내

 

  물비늘 촘촘히 박힌

  사내의 옆구리엔

  흘러간 옛 애인 집 문패가 걸려 있고

  천식이 깊은 아내의 후미진 골방이 있고

 

  저 수몰지구 비탈길엔

  그 해 가장 깨끗한 첫 서리가 내리기도 했을 것인데

 

  내 몸속에도 마땅히 흘러야 할 곳을

  찾지 못해 고여 있는 급수 탱크가 있어

  꼭지를 틀면 쏟아지는 뜨거운

  폭포줄기가 있어, 가끔은

 

  염천(炎川)이 흐르는

  터미널 뒷골목을 쭈뼛거리며

  빈 담뱃갑을 구기거나

  괜한 구두끈을 고쳐 매기도 하는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가을호 발표

 

 


 

조유리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08년 상반기 《문학·선》 신인상을 통해 등단. 15회 시산맥상을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