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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창천(蒼天) 속으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0.

정현종 시인 / 창천(蒼天) 속으로

 

 

세상의 옆구리를 간지르고

간질린 손이 웃듯

아닌 밤중에 문득

폭소(暴笑)의 파도가 출렁거리듯이,

공기(空氣)의 깊은 가슴이 여러

꽃들과 불꽃을 피워내듯이

광대한 어둔 지층(地層)에

보석(寶石)의 날개와 창(窓)이 열려 있듯이

아 가장 깊은 물건보다도 깊은 슬픔이

가장 깊은 기쁨보다도 깊은 물건에 녹듯이

 

오 나는 저 숨막히는 뚜껑

창천 속으로

얼마나!

뛰어들려고 했던가

이 땅과 집과 시인을 벗어놓고

언제나 그리로 뛰어드는 불꽃처럼

언제나 그리로 뛰어드는 나무들처럼

(소리도 없이, 오 흔적도 없이)

뛰어들었던가

뛰어들어 숨을 섞는 꼴이 항상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던가

 

만물의 정신을 가뭇없이! 머금고

만물의 육체를 꿀먹는 벙어리

창천이여, 나의 한숨이여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철면피한 물질

 

 

끝없는 물질이 능청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물질이 치열하고 철면피하게 기억하고 있는

죽음.

내 귀에 밝게 와서 닿는

눈에 들어와서 어지럽게 흐르는

저 물질의 꼬불꼬불한 끝없는 미로(迷路)들,

아무 것도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능청스런 치열한 철면피한 물질!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초록 기쁨

 

 

해는 출렁거리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의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신전(神殿)이다

 

해여, 푸른 하늘이여,

그 빛에, 그 공기에

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

공중에 뜬 물인

나뭇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

흙은 그리고 깊은 데서

큰 향기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넌지시 주고받으며

싱글거린다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때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무들의 향기!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싹이 나오고

꽃이 피었어요

나는 부풀고 부풀다가 그냥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뛰어내렸어요

태양에서

(생명의 기쁨이요?)

달에 바람을 넣어 띄우고

땅에도 바람을 넣어 그

탄력 위에서 벙글거렸지요

 

인제 할 일은 하나

아주 꽃 속으로 뛰어드는 일,

그야

거기 들어 있는 태양들을

내던지겠습니다

향기롭게, 붉게, 푸르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통사초(通史抄)

 

 

옛날 옛날에 덫과 올가미가 살았습니다. 덫은 올가미를 노리고 올가미는 덫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생명 있는 건 돌뿐이었습니다.

생명 있는 건 쇠뿐이었습니다.

우리야 돌 속의 돌이요 쇠 속의 쇠였습니다

 

덫이 올가미를 덮치는 순간 그야 올가미는 덫을 얽었습니다

아, 덫과 올가미는 함정에 빠졌습니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정현종 시인 / 하늘의 허파를 향해

 

 

  못 볼 거인 듯 나는 보았다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 뒤꼍에서 혼자 부서져내리는 흙

  그 무한아름의 나무기둥을 돌고 있는 바람

  하늘의 저 깊은 허파를 향해 타오르는 석등(石燈)의 불꽃

  땅인 줄 알고 만판 떨어져 그늘도 눈부신 동백꽃 숨소리

 

    미친―

    어쩌자구―

    하늘의 입술, 땅의 젖꼭지

    미친―

 

    길이 아닌 게 없고

    돌들은 팔자를 거슬러 둥둥 떠오르고

 

  그리고 그 흙 곁의 내 마음

  그 바람 곁의 내 마음

  불꽃 방향

  동백꽃 숨소리에 물드는 내 마음!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출생.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

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