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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 / 창천(蒼天) 속으로
세상의 옆구리를 간지르고 간질린 손이 웃듯 아닌 밤중에 문득 폭소(暴笑)의 파도가 출렁거리듯이, 공기(空氣)의 깊은 가슴이 여러 꽃들과 불꽃을 피워내듯이 광대한 어둔 지층(地層)에 보석(寶石)의 날개와 창(窓)이 열려 있듯이 아 가장 깊은 물건보다도 깊은 슬픔이 가장 깊은 기쁨보다도 깊은 물건에 녹듯이
오 나는 저 숨막히는 뚜껑 창천 속으로 얼마나! 뛰어들려고 했던가 이 땅과 집과 시인을 벗어놓고 언제나 그리로 뛰어드는 불꽃처럼 언제나 그리로 뛰어드는 나무들처럼 (소리도 없이, 오 흔적도 없이) 뛰어들었던가 뛰어들어 숨을 섞는 꼴이 항상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던가
만물의 정신을 가뭇없이! 머금고 만물의 육체를 꿀먹는 벙어리 창천이여, 나의 한숨이여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철면피한 물질
끝없는 물질이 능청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물질이 치열하고 철면피하게 기억하고 있는 죽음. 내 귀에 밝게 와서 닿는 눈에 들어와서 어지럽게 흐르는 저 물질의 꼬불꼬불한 끝없는 미로(迷路)들, 아무 것도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능청스런 치열한 철면피한 물질!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초록 기쁨
해는 출렁거리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의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신전(神殿)이다
해여, 푸른 하늘이여, 그 빛에, 그 공기에 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 공중에 뜬 물인 나뭇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 흙은 그리고 깊은 데서 큰 향기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넌지시 주고받으며 싱글거린다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때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무들의 향기!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싹이 나오고 꽃이 피었어요 나는 부풀고 부풀다가 그냥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뛰어내렸어요 태양에서 (생명의 기쁨이요?) 달에 바람을 넣어 띄우고 땅에도 바람을 넣어 그 탄력 위에서 벙글거렸지요
인제 할 일은 하나 아주 꽃 속으로 뛰어드는 일, 그야 거기 들어 있는 태양들을 내던지겠습니다 향기롭게, 붉게, 푸르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통사초(通史抄)
옛날 옛날에 덫과 올가미가 살았습니다. 덫은 올가미를 노리고 올가미는 덫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생명 있는 건 돌뿐이었습니다. 생명 있는 건 쇠뿐이었습니다. 우리야 돌 속의 돌이요 쇠 속의 쇠였습니다
덫이 올가미를 덮치는 순간 그야 올가미는 덫을 얽었습니다 아, 덫과 올가미는 함정에 빠졌습니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정현종 시인 / 하늘의 허파를 향해
못 볼 거인 듯 나는 보았다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 뒤꼍에서 혼자 부서져내리는 흙 그 무한아름의 나무기둥을 돌고 있는 바람 하늘의 저 깊은 허파를 향해 타오르는 석등(石燈)의 불꽃 땅인 줄 알고 만판 떨어져 그늘도 눈부신 동백꽃 숨소리
미친― 어쩌자구― 하늘의 입술, 땅의 젖꼭지 미친―
길이 아닌 게 없고 돌들은 팔자를 거슬러 둥둥 떠오르고
그리고 그 흙 곁의 내 마음 그 바람 곁의 내 마음 불꽃 방향 동백꽃 숨소리에 물드는 내 마음!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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