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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규 시인 / 비 오는 날
1 문자도 없는 나라에 날아든 한 장의 편지가 우리를 우습게 한다. 그런데 나는 조금도 웃고 싶지가 않다. 푸른 우체통의 거리로 나서고 싶다. 그때 모든 벽은 깨어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솜털처럼 나는 일어선다. 창을 열면 농염한 바다가 범람한다. 우리들의 뻘밭. 씨알 같은 생각들이 부서져 이미 나는 하나 둘이 아니다. 어떤 색깔이 와서 내 하늘을 잠재우려 한다. 2 내 우산을 가져가지 마시오 식구마다 제 식기에 알맞는 밥을 담아 먹었으므로 조금씩 우산 크기로 자라나 마침내 스타카토로 이어지는 네 몸짓을 숨어 보았지만 어느 지도에도 없는 낱말 소리 나는 대로 적어 보아라 적어 보아라 몇 개의 동전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빛들은 발등까지 내려왔다 순간적으로 주저앉았고 내 발을 어디다 두고 걸을까 언제부터 뿔뿔이 헤어진 식구들 다시 만날 것 같지 않다 식구마다 신장이 달라져 있었으므로 허리 아픈 나는 굽 낮은 장화를 신고 기우뚱거리며 난장이 나라의 내 아우는 두건을 두르고 소리치며 비듬이 많은 조상들과 그 혼들 모두 다른 신발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첨벙첨벙 소리나는 대로 걸어가는 대로 물은 흘러갔고 30여년 전 우산을 훔쳐갔던 이웃 아이는 대나무 장대만 높이 들고 흠뻑 젖어 돌아왔다 3 재채기를 할 적마다 하늘은 깜빡이고 저쪽 하늘은 무슨 색. 오래도록 경작해 온 들에 나가 보았으나 저 풀은 무슨 빛일까. 잡초처럼 끈질기게 공중에 달라붙는 저 깃발은. 언제나 한번은 빛깔이 되고 싶었다. 솜털처럼 부은 얼굴. 닦고 나면 그 얼굴 그 얼굴인데 왜 밤낮 없이 찢기는 얼굴들이냐.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 / 사이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 / 새들아 수색 가자
비가 온다, 얘들아. 장마가 진다. 처마가 없는 집. 이제 떠나야 한다. 우산이 없는 애인. 버려야 한다, 가자. 질척해서 허공 중에 마구 미끄러지고, 우리의 발등이 무거워지기 전에 때때로 전깃줄에 목맨 누이를 버리고, 푸른 지붕 검은 철길을 지나서. 저 밭두렁에 잠잘 수 있을까, 눈알 꼭 뜨고 아침마다 부신 햇살에 깃을 비빌 곳. 가자, 처마가 든든한 보금자리. 젖은 내장이 뒤처지기 전에. 헌 빨래처럼 우리의 몸 헤어지기 전에. 비가 온다, 가자. 다 찢어진다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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