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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하석 시인 / 나른한 현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0.

이하석 시인 / 나른한 현장

 

 

분홍빛 스타킹이. 한 켤레. 구겨진 채

길게 놓여 있다. 초록의 융단 위에.

그것들은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오를 듯.

검은 숄이 그 밑에 놓이고. 따스한 기운 속

그녀의 연약한 목덜미의 기억을 드러낸다.

스타킹의 발치에는. 마루 바닥에 누운 여자의

벌거벗은 하체를 찍은 흑백 사진이 한 장.

던져져 있다. 사타구니의 검은 숲은

늘 스타킹 속 장미 팬티 안에서 젖어 있던.

그녀의 가랑이의 어둠을 보여 준다. 그 아래

흑갈색의 무늬 아로새겨진 빗이.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것. 그러나 이것들

속에 그녀는 없다. 이 정물의 풍경 속. 나른한

초록의 융단 위에 그녀는 찍히지 않았다.

그녀는 이것들을 다 벗어 놓고

어디로 갔나?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이하석 시인 / 날아 오르는 명태

 

 

1

 

말라 비틀린 희푸른 몸 솟구치며

검푸른 또는 청회색 머금은

붉은 기운 감도는 현암 속을

어둠의 불기운 속을

날아 오릅니다.

 

바람의 칼날에 날카롭게 조각된 흰 구름의 가로

펼쳐진 깊푸른 어둠의 바다가 보입니다.

 

2

 

창은 명태의 눈알처럼

하늘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려놓은 명태의 눈알처럼

녹차의 연두빛 물에 푸르스럼한 하늘이 빛납니다. 침대 주위에 쌓아둔 화구들에 기댄 기름 먹은 풋잠이 깹니다. 대낮인가 봅니다. 밖이 부드러이 환하니 봄인지도 모르죠. 녹차 잔을 의자에 내려놓고 일어나 벽에 마른 명태들과 함께 걸린 바지를 걷어 내려서 다리를 찔러 넣습니다. 세 마리의 명태들은 한껏 벌려진 입이 실에 꿰여서 철사옷걸이에 매달린 채 벽에 걸려 대롱거립니다. 명태의 휘부연 아가미 주위에는 푸른 좀이 슬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시장엘 나가지 않아서 새것으로 바꾸지 못했지요. 바지 끝단이 헤어져, 명태들로부터 좀들이 건너와 헤쳐놓은 것이나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어제는 밤 늦게 명태를 그리는 작업을 했고, 새벽에도 깨어나 홀로 캔버스에 청황빛 하늘을 입혔습니다. 이젠 잠시 쉬러 들에나 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늘 그렇듯이, 아파트를 나서면 역이 나오고, 역 앞 나무도 없는 정류장에서 5분쯤 흐린 하늘을 보고 있으면 하양이나 월배행 시내버스가 오겠지요.

 

3

 

들에 나가면 고분 발굴 광경을 볼 때도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개미처럼 구멍을 파고 들락거립니다. 때로 이런 광경도 보이지요. 무덤 위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흰 담배연기가 가늘게 피어 오릅니다.

 

때때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보기도 하지요. 어둡고 습기 찬 돌방 속에는 천년 동안 먼지가 쌓여 검푸른 토기와 청동 말안장을 덮고 있습니다. 구석구석에 낀 어둠을 살피노라면 문득 발 밑에 무엇이 꿈틀하니 밟히는 걸 느낍니다. 조심스레 손으로 잡아 올려보면 그것은 푸른 먼지 또는 도마뱀의 꼬리 같습니다.

 

시간은 도마뱀같은 걸까요,

잡았다고 느낀 순간 본체는 사라져 버리고

그 꼬리만을 남기는.

 

그래, 들에 갔다 온 직후에는 잠깐동안이나마 그려놓은 명태의 몸에 생기가 느껴집니다. 사나왔던 시절을 가두어 지나와 헐렁해진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화폭 앞에 서면, 명태들은 추운 바다 빛 눈망울을 부신 듯 부릅뜹니다. 들의 흙속에 옛 사람들의 방이 있듯 화가의 방 안엔 명태의 하늘이 무수히 날아 오릅니다.

 

4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의 삶은 실패했네.

일방적인 평가지요. 누가 날 안단 말예요.

평생을 썩은 나무등걸만 구해와서 깎는 사람의 숲을 나는 압니다.

평생을 통만 만드는 이의 하늘을 나는 압니다.

평생 돌만 모아 귀꽃을 돋치는 이의 땅을 나는 압니다.

그 덧없고 값 없는 짓거리들, 하며 당신들은 비웃겠지요.

나는 스스로의 일 속에 나를 몰아넣음으로써

스스로를 지켰습니다. 그것도 생산이라고

나는 그걸로 가족들을 먹이고 화구들을 샀지요.

나는 스스로의 삶만을 살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나를 가둔 건 내가 아니라고도 해야겠지요.

나를 가둔 사람들에게 나는 명태의 하늘을 보여줍니다.

나는 나의 삶을 지킨 거예요.

실패하지 않았어요.

 

나는 명태를 그리며 그것들을 하늘로 날리며

나를 지켜준 방 속에 잘 있습니다.

거기에도 물론―생각하기에 따라서는―사방으로

검은 하늘과 누런 땅이 있고

그리하여 하늘이며 땅인 자리로

늘 옮겨앉습니다, 하늘과 땅이 맞부딪는 곳으로

패랭이꽃 같은 문이 나 있는.

 

5

 

그의 삶은 실패했네

그는 죽음의 문턱에 두 번이나 섰었네

마른 쑥부쟁이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발 아래 늘 캄캄한 방을 느꼈네

 

그는 다만 색깔문제로

붉은 벽 속에 끌려 내려갔네

해방 직후였네 제길할

그들은 그의 화폭 속의 하늘이 붉다며

바른대로 대라고 윽박질렀네

그 후로 붉은 색은 결코 쓰지 않았네

실패한 삶을 살았네

 

그는 실패한 삶을 살았네

죽은 명태만 그렸네

명태는 한국인만이 식용으로 하지, 하면서

그는 마른 명태만 그렸네

그의 삶이 명태로 말라붙은 걸까

마른 명태는 입 한껏 벌리고 끊임없이 소리치지, 들어봐, 들리진 않을 테지만 비틀린 몸이 짜내는 기막힌 소리가 그 속엔 있지, 고통이든 환희든 명태는 비틀며 소리치지, 하면서

그는 마른 명태만 그렸네

 

그의 삶은 끝까지 실패했네

그는 노년의 문턱에서 큰 병을 만나

죽음의 방문을 열기까지 했었네

고통으로 입 한껏 벌리고

마른 얼굴의 주름 위로

눈물을 흘렸네 실패의 연속이었네

 

그 후에도 그의 삶은 여전히 실패했네

죽음의 문 밖을 나와 비로소

명태를 하늘로 날리기 시작했지만

그의 전시장에서 아내는 허무하다며 울음을 터뜨렸네

명태는 끊임없이 날아 오르고

날아 오르는 그 높이만큼 그의 삶은

공허하게 떠올랐네

그래도 그의 명태의 하늘은 불타고 푸르르며

때로 무한의 깊이로 나타났네

 

6

 

내가 날린 명태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날아 오르지요. 보세요. 나는 실패하지 않았어요.

삶을 가두어놓은 방이

명태의 하늘로 열리면

방이 곧 하늘입니다.

무덤의 안이 옛 사람들의 별자리인 것처럼.

 

벽에 걸린 화폭들 속으로 명태들은

푸르고 노란 또는 불타는 붉은 하늘을

두 눈 부릅뜨고 소리쳐 오릅니다.

물론 저 아래서도 함성이 폭풍처럼 올라옵니다.

풀잎들이 서로 몸 부비며 떠오르는

또는 부딪침으로써 서로 확장되는 소리일까요?

매일 사람을 자기 위에 세우는 들이

스스로의 속의 무덤을 하늘 쪽으로 보여주기 위해

몸 뒤집는 소리일까요?

 

재생이 하늘 저 편으로만 열린다면

나는 하늘 저 편으로 명태를 날립니다.

그런다음 나는 새롭게 돌아오는 밀물 가에

또는 바람에 퍼득이며 피는 제비꽃의 들녘에

당당히 서고 싶습니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이하석 시인(기자)

1948년 경북 고령군 출생. 전쟁 직후인 1953년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한 그는 대명동 난민촌 언저리에서 자람.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971년 '현대시학' 등단. 1978 영남일보 기자. 1980 대구매일신문 편집국 문화부 기자. 2005 영남일보 논설실 실장. 시집『투명한 속』(1980) · 『김씨의 옆 얼굴』(1984) · 『우리 낯선 사람들』(1989) · 『측백나무 울타리』(1992) · 『금요일엔 먼 데를 본다』(1996) 등을 냈다. 1990 제9회 김수영문학상. 1990 도천문학상. 1992 제4회 김달진문학상. 1996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