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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일 시인 / 숲과 환(幻)
내 의견의 이랑에서 치마를 걷어 올린 용진(勇進)의 숲. 새들은 날개에 가난한 연가를 달고 부끄럽게 따라 다니는 바람난 음성들. 재빠른 팔다리에 맹수들은 일월(日月)을 매달고 영겁을 출렁이고 뒤따르는 창(槍)끝, 비끼면서 울렁이는 숲. 사이에 망각의 나라로 거칠게 흐르는 산(山)물 번쩍이는 어족들.
숲에 기대어 열심히 펄럭이는 하체의 아름다운 실감의, 아 능동의 장소에서 의지 안에 솟아난 과오의 끝을 지나서 세계인의 늠름한 이마를 건드리는 우울한 내의(內衣)의 내란(內亂)들.
비로소 상처의 눈을 뜨는 처녀들은 아는가, 뱀의 황홀한 알몸의 신앙과, 잔인한 끈기를. 생성의 살해의, 격렬한 힘이 분배되고 다수의 인격이 유괴되는 만인(蠻人)들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도덕을.
대중의 끊임없는 응시를 빠져 나온 책갈피의 치열한 사건을 시간을 서울의 타인들이여, 뽑아들고 신의가 빠져나간 치맛자락을 흔들어 버려라. 그리하여, 나의 숲을 시(詩)를 항상 나의 독단(獨斷)인 주택 위에서 사랑하라. 사랑하라. 서울의 이웃들이여, 여기는 불붙는 나의 숲, 나의 모퉁이에서 서성여라.
내 의견의 이랑에서 타오르는 천국 기어오는 음악이 돌진하면, 감화받는 언어와 숲에 기대인 하체의 쓸쓸한 항변.
아침 선박, 선명문화사, 1965
조태일 시인 / 시인(詩人)의 방랑
내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발바람이 있어 잘 탄다.
내가 찾는 땅을 어서 찾아가서 무릎 꿇고 긴긴 입맞춤을 하리.
`구름에 달 가듯이' 갈 수 없어서 혼비백산하듯, 번개불에 콩볶듯 우당탕 뛰며 달린다.
내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신난다. 신난다.
제군, 폭탄 떨어지고 빗발치는 탄환 속에서 `구름에 달 가 듯이' 가 보아라. 어정어정할 때가 따로 있지.
뛰다 뛰다 지치면 휴식이란 것이 있지.
폭탄 떨어진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가쁜 숨 몰아쉬며 두고 온 가족이며 내팽개친 책들을 생각하다가
포성이 울리면 울리는 쪽으로 또 뛰고 또 뛴다.
벌떼처럼 몰린 친구들을 만나 가쁜 입술로 긴긴 입맞춤을 하리.
내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물을 피해 잘도 뛴다. 잘 탄다, 신난다.
가거도, 창작과비평사, 1983
조태일 시인 / 식칼론(論) 1
창 틈으로 당당히 걸어오는 햇빛으로 달구었어! 가장 타당한 말씀으로 벼리고요.
신라의 허황한 힘보다야 날카롭고 정읍사의 몇 구절보다는 덜 애절한 너그럽기는 무등산 허리에 버금가고 위력은 세계지리부도쯤은 한칼이지요.
흐르는 피 앞에서는 묵묵하고 숨겨진 영양 앞에서는 날쌔지요. 비장하는 데 신경을 안 세워도 돼, 늘 본관의 심장 가까이 있고 늘 제군의 심장 가까이 있되 밝게만 밝게만 번뜩이면 돼요 그의 적은 육법전서에 대부분 누워 있고…… 아니요 아니요 유형무형의 전부요.
식칼론, 시인사, 1970
조태일 시인 / 식칼론(論) 2
뼉다귀와 살도 없이 혼도 없이 너희가 뱉는 천 마디의 말들을 단 한 방울의 눈물로 쓰러뜨리고 앞질러 당당히 걷는 내 얼굴은 굳센 짝사랑으로 얼룩져 있고 미움으로도 얼룩져 있고
버려진 골목 어귀 허술하게 놓인 휴지의 귀퉁이에서나 맥없이 우는 세월이나 딛고서 파리똥이나 쑤시고 자르는
너희의 녹슨 여러 칼을 꺾어 버리며 내 단 한칼은 후회함이 없을 앞선 심장 안에서 말을 갈고 자르고 그것의 땀도 갈고 자르며 늘 뜬 눈으로 있다 그 날카로움으로 있다.
식칼론, 시인사,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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