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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 /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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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존재하기를 그쳤다. 물질과 허깨비만이 왔다갔다한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 가장 강력한 경멸의 뒤범벅을 우리는 오늘날 삶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 공포와 경멸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하하. 그러니 그 삶이라는 것에 손이 닿자마자 손은 썩기 시작하고 그 삶이라는 것 속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발은 썩어버린다. 그 문드러진 팔다리로 나는 힘차게(!) 걸어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짓과의 타협을 우리는 오늘날 삶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더 많은 거짓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술보다 더 지독한 마약(麻藥)이 필요하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정현종 시인 / 정들면 지옥이지
……또 다른 사람들은 권력(힘)을 얻게 되는데, 그들의 성공의 조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권력을 얻으려고 한번 죄를 지었으면, 그들은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은 자유를 얻기 위해 그것(권력)을 사용한다…… ―마르끼 드 사드의 세계에 대한 모리스 블랑쇼의 설명의 일부
말[言語]을 퍼내고 버리고 다시 퍼내도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시체들은 아주 깊이 가슴보다도 깊이 묻혀 있는 모양이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좋은 풍경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지식인의 환생(幻生)
축영산(祝靈山) 자락에 있는 외양간으로 어느 날 지식인 대여섯이 들어갔습니다. 외양간을 고쳐 별장을 만든 주인 상섭도인(商燮道人)이 불러서 갔지요, (평소에도 주인은 외양간 내부를 손수 고친 데 대해서 거기서 맞는 아침의 새소리에 대해서 내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자연과 노동이 그 얼굴을 참 환하게 하는 걸 보았습니다) 밖에서 보면 틀림없는 외양간, 조그만 창 중턱 높이로 기운 호박밭에서 딴 호박 하나를 주인은 웃으며 들고 들어왔습니다. (손에 뭘 들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이는데 가령 호박 같은 걸 들고 다니기를 나는 제안합니다) 안주인 김정매 여사는 고기를 굽고 우리는 소주와 함께 먹었습니다. 산과 공기도 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씀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지식인이 내 눈에 이뻐 보였습니다. 외양간 속의 지식인들― 소와 외양간의 후광은 대단했으며 문득 모두 소가 된 듯했고 비로소 그 사람들이 이뻐 보였습니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집
떠남도 허락하고 돌아감도 허락한다 떠나는 길과 끝나는 길이 만나서 모든 송중(送中)의 하늘에 별을 빛나게 하고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한 번의 폭포로 노래하게 한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은 목동이여 찾아 헤매는 그대 마음인데 부는 바람과 흐르는 시내가 자비와 쓸쓸함으로 온다 한들 어떤 편안한 잠이 그대의 소유와 상실을 덮어줄까 어떤 길이 마침내 죽음에게 길을 열어줄까.
안정은 제 마음을 버리고 강물에 비치는 고향 때때로 무의식으로 우는 이마 깨어서도 젖는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창(窓)
자기를 통해서 모든 다른 것들을 보여 준다. 자기는 거의 부재(不在)에 가깝다. 부재(不在)를 통해 모든 있는 것들을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이 넓이 속에 들어오지 않는 거란 없다. 하늘과, 그 품에서 잘 노는 천체(天體)들과, 공중에 뿌리 내린 새들, 자꾸자꾸 땅들을 새로 낳는 바다와, 땅 위의 가장 낡은 크고 작은 보나파르트들과………눈들이 자기를 통해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 외로와하는 이건 한없이 투명하고 넓다. 성자(聖者)를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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