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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9.

정현종 시인 /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1

 

  더 이상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존재하기를 그쳤다. 물질과 허깨비만이 왔다갔다한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 가장 강력한 경멸의 뒤범벅을 우리는 오늘날 삶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 공포와 경멸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하하. 그러니 그 삶이라는 것에 손이 닿자마자 손은 썩기 시작하고 그 삶이라는 것 속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발은 썩어버린다. 그 문드러진 팔다리로 나는 힘차게(!) 걸어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짓과의 타협을 우리는 오늘날 삶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더 많은 거짓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술보다 더 지독한 마약(麻藥)이 필요하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정현종 시인 / 정들면 지옥이지

 

 

     ……또 다른 사람들은 권력(힘)을 얻게 되는데, 그들의 성공의 조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권력을 얻으려고 한번 죄를 지었으면, 그들은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은 자유를 얻기 위해 그것(권력)을 사용한다…… ―마르끼 드 사드의 세계에 대한 모리스 블랑쇼의 설명의 일부

 

  말[言語]을

  퍼내고

  버리고

  다시 퍼내도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시체들은 아주 깊이

  가슴보다도 깊이

  묻혀 있는 모양이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좋은 풍경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지식인의 환생(幻生)

 

 

축영산(祝靈山) 자락에 있는 외양간으로

어느 날 지식인 대여섯이 들어갔습니다.

외양간을 고쳐 별장을 만든

주인 상섭도인(商燮道人)이 불러서 갔지요,

(평소에도 주인은 외양간 내부를

손수 고친 데 대해서

거기서 맞는 아침의 새소리에 대해서

내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자연과 노동이 그 얼굴을

참 환하게 하는 걸 보았습니다)

밖에서 보면 틀림없는 외양간,

조그만 창 중턱 높이로 기운

호박밭에서 딴 호박 하나를

주인은 웃으며 들고 들어왔습니다.

(손에 뭘 들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이는데

가령 호박 같은 걸 들고 다니기를 나는 제안합니다)

안주인 김정매 여사는 고기를 굽고

우리는 소주와 함께 먹었습니다.

산과 공기도 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씀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지식인이 내 눈에 이뻐 보였습니다.

외양간 속의 지식인들―

소와 외양간의 후광은 대단했으며

문득 모두 소가 된 듯했고

비로소 그 사람들이 이뻐 보였습니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집

 

 

떠남도 허락하고

돌아감도 허락한다

떠나는 길과 끝나는 길이

만나서

모든 송중(送中)의 하늘에

별을 빛나게 하고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한 번의 폭포로 노래하게 한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은

목동이여 찾아 헤매는 그대 마음인데

부는 바람과 흐르는 시내가

자비와 쓸쓸함으로 온다 한들

어떤 편안한 잠이

그대의 소유와 상실을 덮어줄까

어떤 길이 마침내

죽음에게 길을 열어줄까.

 

안정은 제 마음을 버리고

강물에 비치는 고향

때때로 무의식으로 우는 이마

깨어서도 젖는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창(窓)

 

 

자기를 통해서 모든 다른 것들을 보여 준다. 자기는 거의 부재(不在)에 가깝다. 부재(不在)를 통해 모든 있는 것들을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이 넓이 속에 들어오지 않는 거란 없다. 하늘과, 그 품에서 잘 노는 천체(天體)들과, 공중에 뿌리 내린 새들, 자꾸자꾸 땅들을 새로 낳는 바다와, 땅 위의 가장 낡은 크고 작은 보나파르트들과………눈들이 자기를 통해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 외로와하는 이건 한없이 투명하고 넓다. 성자(聖者)를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출생.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

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