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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시인 / 추억에서 27
나를 지극히 아끼던 친이모(親姨母)가 앞바다 물에 몸을 던져 죽고 또 그 이모(姨母)의 육촌(六寸) 시누이 팔촌(八寸) 시누이들이 차례로 끌리듯이 물귀신(鬼神)에게 홀려 목숨을 끊었다.
사지(死地)밥을 올려 달래어도 어두운 밤바다가 되어 이리 뒤채고 저리 꿈틀거리는 짓밖에 딴 일을 못하였다.
배추꽃이 핀 봄의 장관(壯觀)을 밤바다에서도 얼핏 본 것 같으나 그것은 낮에 보던 환한 꽃밭이 아니었고 비수(匕首)가 번쩍이는 무서운 바다가 되어 있었다. 갈 데 없이 이불 속에 들어도 거기까지 공갈하듯이 따라와서 그리운 혼은 바다에 뺏겼는지 텅텅 비어 있었다.
추억에서, 현대문학사, 1983
박재삼 시인 / 추억에서 30
국민 학교를 나온 형이 화월(花月)여관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 그 층층계 밑에 옹송그리고 얼마를 떨고 있으면 손님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을 싸서 나를 향해 남몰래 던져 주었다. 집에 가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두 누이동생이 부황(浮黃)에 떠서 그래도 웃으면서 반가이 맞이했다. 나는 맛있는 것을 많이 많이 먹었다며 빤한 거짓말을 꾸미고 문득 뒷간에라도 가는 척 뜰에 나서면 바다 위에는 달이 떴는데 내 눈물과 함께 안개가 어려 있었다.
추억에서, 현대문학사, 1983
박재삼 시인 / 친구여 너는 가고
친구여 너는 가고 너를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대신 그 그리움만한 중량의 무엇인가가 되어 이승에 보태지는가, 나뭇잎이 진 자리에는 마치 그 잎사귀의 중량만큼 바람이 가지 끝에 와 머무누나.
내 오늘 설령 글자의 숲을 헤쳐 가락을 빚는다 할손 그것은 나뭇가지에 살랑대는 바람의 그윽한 그것에는 비할래야 빌할 바 못되거늘, 이 일이 예삿일이 아님을 친구여 너가 감으로 뼛속 깊이 저려 오누나.
대관령 근처, 정음사, 1985
박재삼 시인 / 포도(葡萄)
형(刑)틀에 매여 원통하던 일을 이승에서야 다 풀고 갔으련만 저승에 가 비로소 못잊겠던가 춘향(春香)이 마음은 조롱조롱 살아 다시 열렸네.
저것은 가냘피 아파 우는 소리였던 것을, 저것은 여릿이 구슬 맺힌 눈물이던 것을, 못견딜 만큼으로 휘드리었네.
우리의 무릎을 고쳐, 무릎 고쳐 뼈마치는 소리에 우리의 귀는 스스로 놀라고, 절로는 신물이 나, 신물나는 입맛에 가슴 떨리어, 다만 우리는 혹시(或時) 형리(刑吏)의 손아픈 후예(後裔)일라…
그러나 아가야, 우리에게도 비치는 것은 네 눈이 포도(葡萄)라, 살결 또한 포도(葡萄)라……
―`춘향(春香)이 마음'초(抄)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피리 구멍
햇빛은 제일 많이 나뭇잎과 강물에 와서는 놀다 가는 모양이더라 달빛 또한 그런 모양이더라.
그런 하염없는 세상에 나는 그들의 사돈의 팔촌이나 되던가 부모 섬기고 형제 위하기 한결 얼룩진 무늬가 드디어 살에 패인 피리 구멍 되어 뿌리 젖은 나무로 우느니, 또한 발 적시는 강물로 우느니.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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