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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일 시인 / 아침 연가(戀歌)
나는 슬프지 않네 끝없는 방황이 열리는 여기는 나의 오히려 다정한 무덤. 까마귀 울음에 아침이 깨어 비척거리면 단좌한 물동이에서 조국이 잠깬다 나의 침실도 잠깬다. 한 모금의 찬물 마시고 외출해야지 그래서 물동이에 고여 있는 저것이 저녁내 흐느끼던 KOREA의 눈물이라고 서녘 하늘을 가던 초동의 배고픈 눈물이라고 한 모금의 아침 찬물을 나는 마셨네. 둘러보아도 폭풍뿐인 불신뿐인 땀 흘리는 산만(散漫)의 장소에서 나를 흔들고 떠나는 것을 보네.
음악이 옷 걸치는 난해한 숲 속에서 아침을 차며 산맥을 뛰어오르는 짐승을. 둘러보아도 한(恨)뿐인 가난한 음성뿐인 나의 봉창에서 서성거리는 늙은 환각만을 아침의 공복만을. 여기를 빠져 나가야 저 사립문을 열고 나가야 오늘 하루가 부끄럽지 않겠네 너와 나의 끝끝내 하나뿐인 노동은 너와 나의 하늘 어디 만큼서 뒹굴고 있을까? 새들의 짐승들의 휴식은 끝났을까?
나는 슬프지 않네. 끝없는 모색의 여기는 나의 오히려 다정한 무덤인가? 결의의 무덤인가?
아침 선박, 선명문화사, 1965
조태일 시인 / 연습(演習) 1
나는 내 방을 슬프게 장악하는 병정(兵丁). 내 시간이 흔들리면, 처량하게 흔들리면 계절의 밑둥이에 앉아 있는 우울. 내 솥끝에서 열려오는 순진의 방, 걸려 있는 내 집념. 멋대로 움직이는 육체 아래 우거진 감정을, 불신의 아침을 나는 언제쯤 지성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나는 울어 버릴까. 시 속에서 살해해 버릴까. 차라리 슬픈 지역이라서 차라리 아름다운 패지(敗地)라서 끝없이 용해(溶解)되는 나, 떠나는 목소리들. 사자(死者)들의 아랫도리를 지나서 내 피가 외롬에 떨고 있는 밤의 아랫도리를 지나서. 자유가 무성케 자란 무능을 나의 친한 학동들이 성의껏 유괴한 태양을 굴리며 떠나가는 목소리들.
타인의 시간이 흔들리면, 처량케 흔들리면, 나의 울분은 세계를 장악하는 병정.
아침 선박, 선명문화사, 1965
조태일 시인 / 옹기점 풍경(甕器店 風景)
한반도(韓半島)의 모든 바람은 물론 세계의 모든 바람들도 함께 섞여 멋모르는 마음들은 마음 놓고 밤낮없이 여기 와서 논다.
어떤 놈은 풀피리, 버들피리를 불고 어떤 놈은 피리, 퉁소를 불고 어떤 놈은 장구, 북을 치면서 논다. 하, 어떤 놈은 하모니카, 트럼펫, 색소폰을 분다.
한반도의 모든 빛은 물론 세계의 모든 빛들도 함께 섞여 멋모르는 마음들은 마음 놓고 밤낮없이 여기 와서 논다.
어떤 놈은 느릿느릿 양산도 춤을 추고 어떤 놈은 깝쭉깝쭉 보릿대춤을 추고 어떤 놈은 허리 끊어져라 트위스트를 추고 하, 어떤 놈은 고고춤을 원없이 춘다.
서러운 우리들은 밤낮없이 묵묵무답(黙黙無答)인 채 아무데나 놓이고 밤낮없이 저러는 풍경은 일몰(日沒)이 와도 걷히지 않고 일출(日出)이 와도 걷히지 않는가.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조태일 시인 / 우울한 방(房)
1
지치지 않고 타협도 멀리, 피를 쏟으며 가는 시간 위에 우리를 눕혀 방을 살아라 한다.
신(神)에게 유괴된 방 동편의 창이 하나씩 닫혀지고 있을 때 탈영한 몇 알 햇살은 창 밖에 서성인다.
쌓아 온 범죄들 사이 우울한 지혜. 두고 간 발언들은 구석에서 일제히 일어서며 충돌, 결국 우리들 위에 쓰러진다 쓰러진다.
어둠은 대낮을 재우고 그늘이 늘어진 설합 속에 보유됐던 아우성, 그리고 눈부신 사고. 내 곁에서 나란히 잠을 찾을까? 시민은 각자 잠을 찾을까?
2
우리가 여기 온 까닭은…… 가만히 눈감아 보니 신탁(信託)을 베고, 흔들리는 곡선의 지친 쾌감, 그래서 결실, 옆에서 시간들은 부끄럽게 성숙했다.
그리하여 그 부끄러운 침실의 시간들은 어디로 우리를 인도할 것인가. 타협도 멀리 가고만 있다.
우주의 한쪽, 자꾸만 잃어가며 잃어가며 거대한 평화를 승리(勝利)를 시민들은 붙잡질 못한다.
거리 위를 산책하는 평화의 기폭들. 한량(限量) 없이 뱉아 놓은 주택들 사이 감정들에게 침몰당하고 수인(囚人)의 일순(一瞬)이 난해한 무릎 밑에서
피로한 용단을 내리고 쓸쓸히 외유의 길을 떠났다.
3
방에 남은 것이란 술잔을 들면 술잔 사이에서 처절히 깨지는 오늘 안에 부족한 사랑과 자유 몇 개와 성난 여인이 있다.
밖에서 서성이는 햇살, 아직 가능은 외면하지 않았다. 쓰러진 아우성을 세우고 창을 향하여 돌진하는 때 골목에서 얻은 여인은 골목에 버려야지 천정이 뚫리면 내리는 은혜는 소중히, 그러나 모든 걸 잊어야지.
외유의 길을 떠난 것들 잠시 휴식처를 찾았을까. 끝내 행방을 모르고 밝아 오는 아침까지 나는 잠을 찾을까. 시민은 각자 밤을 찾을까.
지치지 않고 타협도 멀리, 피를 쏟으며 가는 시간 위에서 방을 살아라 한다.
아침 선박, 선명문화사,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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