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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덕규 시인 / 애인을 배낭 속에 넣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2.

박덕규 시인 / 애인을 배낭 속에 넣고

 

 

애인을 배낭 속에 넣고 아침이면

학교로 간다 멀리 강물을 내다보면 덜컹대는 전철 속에서도

행복하다 강의실 창가에 앉아 내가 졸고 있는 동안

애인은 배낭 속을 빠져 나와 의자와 의자 사이를 교단 위를 교수님의

콧잔등 위를 뛰어 다닌다 아무도 그녀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휴식 시간에 애인은 잔디밭에 나가

잔디를 뜯어 먹으며 놀고 있다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이다 나는 자꾸 행복스러워진다 애인을

배낭 속에 넣고

 

방과 후에 술집에 모인다

피 같은 파전을 흘린다고 친구들은 울분에 차기도 하지만

내가 버리는 술과 찌꺼기는 배낭 속의 애인이 받아먹는다 어허

취한다 애인이 탄성을 지른다 야

조용히 해 나는 발끝으로 애인의 젖꼭지를 찾아 누르며 속삭인다

울분 아이들은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며 노래를 부르거나 민중과

지성을 꾹꾹 눌러 담아 마시거나

분노의 포도알이 되어 거리로 나선다

 

튀어 나간다 애인을 배낭 속에 넣고 나는

불온 서적과 외설 잡지는 보고 싶지 않다 보고 싶다

복역한 친구와 갈 수 없는 나라에는 안 가고 싶다 먹고 싶다

켄터키 치킨과 빛나는 사과알은 안 영글 것이다 어어

취한다 골목길은 큰 길로 통하기도 하고 어두울수록 별빛 더욱 진리처럼

내리 깔린다 밤에 초롱초롱 애인은 내 품에 온다 내

성감대 가득히 행복은 넘쳐 흘러 방 안은 흥건한 홍수에 젖고

한밤내 애인과 나 물풀처럼 흐느적거리다가

어느 순간의 소용돌이 비몽사몽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 / 이웃 황태자 부처가 우리 마을에

 

 

 우리는 마오리족, 배운 것은 없지만 마음은 착해 400여년 동안 우리를 보살펴 준 이웃나라 황태자 부처가 금빛 머리칼 빛나는 어린 왕자를 안고 우리 마을에 오시던 날……

 

지난 은혜를 못 잊어요 우리는

잘 터지는 공을 하나씩 만들었지요

공 속에는 영양가 있는 음식물이 들었는데

생달걀, 케첩, 밀반죽, 아이스크림……

돈 많이 들었어요 합창도 연습했죠 아에이오우우우우-

스트리킹도 연습했지요 옷 벗는 일이라면

매양 자신 넘치는 일이었으니깐요

그날 폭우가 쏟아졌어요 천정만 덮고

황태자 부처의 금마차는 흙탕물을 튀기며 오고 있었지요

그래도 우산도 안 쓰고 반기는 군중 틈에서 갑자기

우리 중 하나가 알몸으로 달려들고 악! 하고

즐거워하시는 황태자비 황태자께서도 신기해하는데

우리는 공을 던졌지요 호위병의 호각 소리 황태자비의 얼굴에

달걀이 터져 흐르고 황태자의 눈에 케첩이 젖어요

영양은 고급으로 사방에서 비명 소리 박수 소리 우리는

우우우 합창했지요 공은 끝없이 날아가 안겼고

호위병을 피하며 마차 주위를 뱅뱅 도는 알몸의 그것이

덜렁덜렁 황태자비께서는 왜 저리 몸둘 바를 모르실까

우우우 공은 마차를 더욱 빛나게 했지요 천정도

내려앉았지요 시녀의 팔에 안긴 어린 왕자의 얼굴에

아이스크림이 터져 버렸어요 왕자는 사색이 되어

으앙! 으앙! 울고 황태자비가 급히 감싸 안았어요

쏟아지는 공 폭탄 속에서도 의연한 모성애 우리는

코끝이 찡해 왔어요 순간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공도 못 던지고 스트리킹도 못 하고 합창도 못 하고 순순히

주저앉아 버렸어요 흙탕물에 엉덩이 깔고 엉엉 울어울어

 

 우리는 마오리족, 배운 것은 없지만 마음은 착해 그 희화적이고 감동적인 영접 행사 이후 다시 400여년 동안 이웃나라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지요 긴 세월……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소설가)

1958년, 경북 안동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0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아름다운 사냥>, <골목을 나는 나비> 등. 2005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2014.1 한국문예창작아카데미 회장. 1982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 1982 중앙일보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 1992 편운문학상 수상. 2001 제14회 경희문학상 소설부문 수상. 2015.5 제30화 이상화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