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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78년 5월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2.

조정권 시인 / 78년 5월

 

 

요즈음 마시는 술은

피가 되어 나온다.

의사는 장(腸)이 단단히 고장났다고 하나

피가 되어 나오는 것이 어디 술뿐이냐

벌어먹는 밥도 간밤의 생각도 아침이면 으레 피가 되어 나온다.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허공(虛空)에 못을 박는 일이나 진배없다.

생활이란 커다란 바위 옷을 둘러 입고

요즈음에는 볼펜으로 종이에 글씨를 파가듯이 시(詩)를 쓴다.

똥이나 먹어 똥이나 먹어, 자신을 탓하면서

검은 땅 속에서 솟는

땅 소나기를 맞으면서.

 

시편, 문학과예술사, 1982

 

 


 

 

조정권 시인 / 79년 가을

 

 

이삿짐을 꾸리다가 장롱 뒷벽 먼지 구덩이에서 찾아낸

결혼사진첩을 아내는 애지중지 책더미와 함께 싸기 시작한다.

육개월에 한 번씩 소동을 벌일 때마다 들쑤셔지는 세간살이 속에서도

책과 사진첩은 으레 따라가야 되는 것이라고 아내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는 일체 상관할 바 없이

안심하고 허리에 매달려 따라오는 어린 것들과 같이

 

그러나 나는 반대다.

우리가 미련을 가지고 끌고 다니던 것

한사코 소중하게 모셔놓았던 것들 가운데도

버려야 할 것은 너무 많고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또다시 긴 겨울을 나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애지중지 정돈하려 하는 책과 기념사진첩

그 속에 있는 우리들의 과거는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고

정리되어 있는 과거가 우리들의 생활에서 장식이 되는

그런 이로움은 이제부터는 막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한겨울을 나야 하는 것이다.

살아보면 살아볼수록 더 좁디좁은 방(房)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 사람에게는 이삿짐이란 가벼워야 하고 간편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편, 문학과예술사, 1982

 

 


 

 

조정권 시인 / 겨울 저녁이 다시

 

 

정신(精神)은 점점 위독해진다

창밖의 일몰(日沒), 여섯시 이십분의 재

사내가 항구(港口)에서 피우고 있는 감옥의 담배

사람들 속에 섞여서 누워서

피우고 있는 감옥의 담배

모든 것을 제압하고 무시하고

뻑뻑 피우는 담배

재떨이에는 여섯시 이십분까지의 재

머리끝의 재

교회당 꼭대기의 재

조금 있으면 곧 떨어질

여섯시 삼십분의 재

발바닥까지 재를 떨구는

암담한 여섯시 삼십분까지의 재

 

비를 바라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심상사, 1977

 

 


 

 

조정권 시인 / 구름의 편지

 

 

처녀 시집을 보면,

갓 태어난 아기 예수의 눈동자를 보고 있는

스무 개의 눈동자가 들어 있다.

 

나무에 기대어

더 가까이

먼 곳을 듣는 감각이 살아 있다.

 

태풍 속에 항진(抗進)을 계속해 온 귀와

원정(遠征)의 깃대를 높이 세운 가슴들도

살아 있다.

 

스스로에게 제왕(帝王)처럼 명령(命令)하고 노예처럼 복종해 온

신성(神聖)한 노동(勞動)도 살아 있다.

 

처녀 시집을 펼치면

쇠못 같은 빗줄기 소리가 난다.

도마뱀 한 마리가 물섶으로 뛰어드는 소리도 난다.

 

그러나 처녀 시집 속에는

네가 너를 쏘려 했던 피스톨이 아프게 묻어 있다.

네가 5월(月)의 우체국으로 한 짐 지고 가서

그리운 라이벌들에게 소포로 부친 햇살들은

이제 식고 없다.

 

처녀 시집은 영원한 그리움이다.

부치기를 망설였던 순결한 영혼의 한 때가

네게도 있었다.

 

처녀 시집은 영원한 그리움이다

왜냐하면 너의 라이벌은 너 자신이었으니까.

 

만약에 말이다.

 

내가 마지막 시집을 내게 된다면

나의 저작권은 흰 구름에게 넘기련다.

 

내 주(主)인

구름에게,

내 삶의 로얄티도.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趙鼎權, 1949년~2017년)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19690년 《현대시학》 창간호(3월호)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2017년 11월 8일,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