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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시인 / 모래알 소리
모래 언덕에서 몸을 빼어 빈 깡통은 바다로 굴러내린다, 소금물이 속에 차 올라 물보라 속 헛된 꿈을 게워내면서.
깡통들끼리 모인 골짜기, 바위와 모래뿐인 어슴푸레한 속, 물풀들은 스스로의 발목을 끊으며 달아나고, 소금은 반짝거리며 흩어진다. 낮 동안 수면에도 떠올라 다투던 쇠들 다시 몇 개의 알 수 없는 휴전을 나눠 갖고 잠기고, 깡통들의 모서리 입 다문 조개들의 동리 어귀 물풀들의 뿌리 끝이 분명해진다. 이윽고 깡통 속 모래알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바다는 더욱 깊어지고 어두워진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 / 못 1
우리는 인간의 손들 사이를 빠져나와 많은 거대한 쇠들에서도 멀어졌다, 반짝거리는 침들 끊임없이 무디어지라고 외치면서. 가을 밤, 흙속에서 우리는 자려고 한다, 풀들의 뿌리 밑에 누워서, 붉게 녹슨 몸들을 더욱 안으로 꼬부리면서. 쓰레기 하치장 부근, 활자 날아가 버린 신문지를 끌어 덮으며, 우리도 이미 많은 것들을 날려 보낸 후.
쉬이 잠이 오리라. 빗물에 눕는 풀들 소리 없이 흐느끼고, 밤이 빗물 속에 모든 어둠을 풀어 놓을 때 못들의 잠은 때로 반짝거린다, 흙속에서 자갈 틈서리에서 또는 철교의 침목 곁에서. 빗물에 지워지며 눕는 마음, 껌종이와 타임지와 서양 여자 노랑머리 퇴색한 휴지 속에서 그들의 꿈은 심한 욕지거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며.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 / 못 2
그들은 녹슨 몸 속에도 여전히 쇠꼬챙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깃든 어느 곳에서든 부스럭거리며 그들은 긁고 찌른다. 흙속, 헐어 버린 건물 안, 이전해 버린 공장의 빈 터, 폐쇄해 버린 술집의 판자 틈, 버려진 구석 어디에서나 그들은 내팽개쳐진 채, 나무든 흙이든 풀이든 바람이든 강철이든 지나가는 쥐의 발목이든 찌른다.
새로 짓는 건물의 벽에서도 떨어져 흙속에 빠지면서 시멘트 묻은 서까래에 깔리면서 또 하나의 못이 집 밖을 나온다. 하수구를 지나 개울가 자갈밭에 만신창이 몸으로 떠돌다가 그는 침을 숨긴 채 물 밑에 반듯이 눕는다, 흐르는 물을 조금씩 찌르면서, 송어 아가미의 피를 조금씩 긁어내면서, 어느덧 그 자신도 쇠꼬챙이도 조금씩 꼬부라지면서,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 / 밀양강 1
인가 쪽을 달래는 강물로 산자락을 깎는 역사가 아프다. 방해와 변형의 마음이 이룬 둑 위에서 자다가 문득 다가서는 낯선 물소리에 꿈은 다급해진다. 나의 전부를 흘려보내고 난 다음 인적 없는 쪽으로 칭얼대는 강.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이하석 시인 / 밖
문을 열면 어떤 길이 어떤 어두운 밝음이 어떤 미로가 나를 이끌 것인가
나는 내다본다 속에서 어둠의 뇌성은 치고
나가고 싶다 초록의 문을 열고 싶다 나는 또 나가고 싶잖은 마음이 인다 또는 잠시 나가 패랭이나 캐서 화분에 심어보고 싶다 이 위태로운 어질어질함
누가, 바깥에서 문고리를 만진다 …밖에서…누가 내 방의 어두운 창유리를 닦는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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