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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재삼 시인 / 한(恨)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3.

박재삼 시인 / 한(恨)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설움이요 전(全)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 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한 경치(景致)

 

 

풀밭에 바람이 날리듯이

남쪽바다에 햇살이 날리네.

 

바야흐로

갈매기 두어마리

무심(無心)끝에 날으고

돛단배 가물가물

먼 나라로 갈듯이 떴네.

 

오, 안스러운 것,

하얀 하얀 저것들,

어디까지 가서야 지치는 것이랴,

지쳐서는 돌아오는 것이랴.

 

꽃지는 꽃그늘엔

바람이 잠시 피하고

저것들의 깃쭉지와 돛폭 아래선

햇살이 잠시 피하는가.

사람들이여

이승과 저승은 어디서 갈린다더냐.

 

풀밭에 바람이 흐르듯이

남쪽 바다에 햇살이 흐르네.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박재삼 시인 / 한낮의 소나무에

 

 

오늘은 언덕 위에 청청(靑靑)한 한그루 임같은 소나무에 오를까보다. 학(鶴)같이야 깃을 쳐 못오른다 할지라도 스미어 스미어서 오를까보다.

 

강물로 우리는 흘러가다가 마음드는 자리에 숨어 와보면, 머언 그 햇볕 아래 강물 만큼은 반짝인다 반짝인다 할 것 아닌가.

 

솔잎을 보아라, 알 것 아닌가.

 

우리의 몸이 요모 조모 구멍난 벌집이 되었을 때, 우리는 먼저 마음가는 데 두고는 그냥 못 있는다.

 

그리하여 드디언 푸른 깃에 녹아가 정신나간 채로 우리는 안 지치는 한 그루 소나무가 될 것 아닌가.

 

무시(無時)로 낭패하기 쉬운 어지럼병(病)이 우리를 잡아가, 우리는 썩어질 몸밖에 안남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울음의 구슬 속에는, 문득 반짝이는 소나무가 한그루 정확(正確)하게 서 있던 게 아닌가.

 

잘 다스려 보아라, 안 그렇던가.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한 물음

 

 

달이여, 달이여.

네가 나를 따라올 때의

물같은 그림자와는 어떻게 다르게

저 흉칙한 도둑놈 그림자를

만들어주고 있는가.

 

바람이여, 바람이여.

내 옷자락에 머리카락에

이제 새삼 달라붙어

스물 몇 살때의

빚을 달라는 난데없는 이 짓을

너는 그 아름다운 여인한테도 하고 있는가.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

 

 


 

 

박재삼 시인 / 한 작정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어쩔까나,

허망을 느끼는 자가,

가락도 슬픈 가락을 뽑는 자가,

인생도 처절하게 고민한 자가,

결국 조금은 남아난다는

이 역사의 진실을

오늘 아득하게나마 깨달으며

처자에게는 섭섭하지만

 

나 혼자의

깊은 시름을 반추하며

깨끗한 시를 쓰고자 한다.

아, 이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고 본다.

 

해와 달의 궤적, 신원문화사, 1990

 

 


 

박재삼 (朴在森. 1933년-1997년) 시인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1996 제4회 한국공간시인상 심사위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