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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태일 시인 / 이웃의 잠을 위하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3.

조태일 시인 / 이웃의 잠을 위하여

 

 

내 이웃의 잠을 위하여

내 가족의 편한 꿈을 위하여

하늘까지 솟아 버릴까.

목청에 겨워서 솟아 버릴까.

사십평생을 피맺힌 목소리로 지워 버릴까.

 

하루 종일 나를 지배했던

더러운 더러운 몸뚱아리를 이끌고

옥상에 올라서

달과 별들을 쳐다본다.

 

어둠 속에서만 빛나고

술 취한 자의 머리 위에서

더욱 빤짝거리는 빛덩어리들을 바라보며

두 다리를 동동거린다.

온몸을 떨어 본다.

목쉰 소리로 불러 본다.

내 어렸을 적의 전쟁놀음,

장난감 총을 들고 병졸들을 이끌어

 

냇가를 건너 들판을 가로질러

가상의 적지인 부락을 점령하고

지붕에 올라 점령당한 부락을 보았지.

하늘을 보고

병졸들의 함성을 들었지.

그리고 신나 하는 얼굴들을 보았지.

 

나는 옥상에 올라

사십평생의 말 다 뱉아 버리고

하늘로 솟아

오천만 개의 손을 잡으리라.

오천만 개의 가슴과 만나리라.

기막혀 하는 이웃의 잠을 위하여

슬퍼하는 가족의 꿈을 위하여.

 

가거도, 창작과비평사, 1983

 

 


 

 

조태일 시인 / 죽음

 

 

시 쓰는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감상일 수도 있다.

시 쓰는 사람이 삶을 생각하는 것은

언어도단일 수도 있다.

 

시인도 한 번 살고 한 번 죽는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산다고 하지만 살아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죽는다.

 

딱 한 번 죽음이라야

그것이 삶이다.

 

죽음을 피하던 장사 어디 있던가.

책임 있는 죽음이든

책임 없는 죽음이든

죽는 죽음을 누가 말려서

살아나는 죽음을 우리는 보았던가.

 

나 한 사람의 죽음은

수천 사람의 소생일 수도 있거늘

나 한 사람의 삶은 너무 넓게 차지해서

수천 사람이 비좁아할 수 있거늘.

 

지금은 감상이든 언어도단이든

죽음을 한번쯤 생각해 볼 때,

겨울이 더 깊이 오기 전에.

 

가거도, 창작과비평사, 1983

 

 


 

 

조태일 시인 / 칠행시초(七行詩抄)

 

 

1

 

산 너머 무덤이, 흩어진 연대를 받치며

일제히 일어 서고 있을 때 선택되는 과오들.

내실에선 헤일 수 없는 생명이 또한 보류되고

산자락 덮고 이 밤을 새울 풀잎들이 다스리는 고요

헐렁이는 육체들 사이, 빠져 가는 시간들

좀더 가까이서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

우리는 항상 무덤 위에 떠 있다.

 

2

 

하혈(下血)이 심해 울어 울어 지내 오신다는 어머니의

날 정해 두고 서방님 맘 아니 들어 울어 울어 지낸다는 가시내의,

내 완강한 손을 흔들어 방을 흔들어 버린 소식.

이 영어(囹圄)의 가장 아픈 때를 보아

기어드는 햇살 속에 누워 있는 시신(屍身).

옆에서, 그 피, 그 맘 훌훌 마시고

몽롱한 눈을 뜨니 아 하문(下門)에 다다른 내 의식.

 

3

 

서울의 보도 위엔 연애선수들의 흥겨운 보행

은행창구엔 가난한 눈들이 부서지고 있다.

얼마나 흐느꼈을까, 이 나의 모의(謀議)는.

멀리서 돌아 가고 가까이서 죽어 가는 이 한때를 기다려

떠나게 하라, 수습할 수 없는 이 나의 육체를.

가난이 조용히 숨죽여 오던 방 안에서

떠나게 하라. 항상 불륜의 내 시도를.

 

아침 선박, 선명문화사, 1965

 

 


 

 

조태일 시인 / 탁과 억 사이에서

 

 

탁 자는 우리 민족의 언어입니다.

억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탁 자와 억 자가 신문에 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한 해 동안 끊기로 했던 술을

됫술, 말술로 나는 마시기 시작했죠.

 

술을 마신 뒤에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 탁 자와 억 소리가 내 방을

기어다니기도, 천장에 매달리기도 해

여간 무서운 것이 아니지요.

 

밥 먹을 때도 탁과 억 소리가 씹힙니다.

길을 가도 탁과 억 소리가 차입니다.

시를 써도 탁과 억 자만 씌어집니다.

책을 봐도 온통 탁과 억 자뿐이죠.

 

아무래도 중병입니다.

배울 만큼 배웠어도 다른 어휘는 모르고

탁 자와 억 자만 내 머리 속에 가득하죠.

정신병동에서

정신병을 앓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탁?

억?

탁억탁억탁억탁억, 억탁억탁억탁억탁

야산의 수풀 같기도 하고

탁억탁억탁억탁억, 억탁억탁억탁억탁

양영자와 현정화가 탁구 치는 소리 같기도,

김완과 유남규의 탁구 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민주 정치와 독재 정치가 뒤얽혀

싸우는 꼴 같기도 합니다.

거듭 태어나라, 태어나라

신께서 우시면서 간곡히 말씀하시는

간단하면서 단호한 어조 같기도 하죠.

 

탁!

억?

탁! 억? 탁! 억? 탁! 억? 탁! 억?

 

산속에서 꽃속에서, 창작과비평사, 1991

 

 


 

조태일(趙泰一. 1941년-1999년) 시인

전남 곡성 출생. 1970년대 유신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시를 발표하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러 '저항시인'으로 불렸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경희대 대학원 문학 석사학위(1985), 박사학위(1991)를 받음. 196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1964년, 시 〈아침선박〉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1969년 월간 시 전문지 〈시인〉을 창간해 김지하·양성우·김준태 등을 등단시킴. 1974년에는 고은·백낙청 및 신경림·염무웅·박태순·황석영·조해일 등과 함께 민족문학운동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을 주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87년 9월 17일 창립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모체가 됨. 1989년 이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1994~1999 예술대학장을 역임.

시집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연가〉(1985), 〈자유가 시인더러〉(1987), 〈산속에서 꽃속에서〉(1991) 등을 펴냄.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1995)로 제10회 만해문학상을 수상. 1991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2년 편운문학상, 1993년 성옥문화상, 1995년 만해문학상을 받음. 사후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