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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백겸 시인 / 겨울 꽃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2.

김백겸 시인 / 겨울 꽃

 

 

  사계를 촛불처럼 태웠던 칸나는 내 눈에서 지워 졌습니다. 칸나가 긴 못 같은 잎 새를 허공에 두드려 박자 예수의 피 같은 향기가 검은 대지에 흘러내렸던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눈이 오고 북풍이 부는 정원에서 칸나는 오랫동안 내 사랑의 눈길을 받지 못했으니 어릴 적에 죽은 내 동생처럼 지하에서 슬퍼하겠지요. 칸나는 태양과 숲과 바람의 소란으로부터 조용히 쉬고 있습니다. 잠자는 숲 속의 여신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대지의 검은 눈과 내 캄캄해진 눈의 기억으로부터.

 

  칸나는 묘지의 석관아래 누운 시체였으나 내 마음속에서는 죽지 않은 슬픔이었습니다. 겨울 저녁 벽난로의 불꽃으로부터 칸나는 영혼처럼 살아났습니다. 죽은 노국공주의 환영을 보고 기쁨에 잠긴 공민왕처럼 나는 불꽃 칸나를 보고 몸이 뜨거워졌습니다. 참나무 장작으로 불꽃의 잎과 꽃봉오리를 건드리자 칸나는 검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새 봄에 칸나는 불꽃같은 꽃잎과 잎새 못들을 허공에 박아 태풍이 와도 넘어지지 않는 칸나 집을 세우겠지요. 성당미사를 알리는 종탑처럼 칸나는 침묵의 소리를 뿜겠지요. 칸나와 내 몸을 흐르는 시간의 강은 멈춘 적이 없습니다. 칸나는 검은 혼돈의 육체에서 색성촉미향(色聲觸味香)의 구멍을 새로 내어 나비가 날아오는 꿈을 꾸겠지요. 만화경(萬花鏡)에 비친 세상의 모든 파문과 그림자들을 보며, 검은 구름을 항해하는 달처럼 칸나는 시간의 바다를 건너가겠지요

 

웹진 『시인광장』 2009년 봄호

 

 


 

 

김백겸 시인 / 아수라

 

 

  죽음의 다른 이름인 마왕이 나를 찾아온 날처럼 검은 구름은 낮게 깔렸습니다. 눈이 메마르고 입술은 갈라지고 시체가 타는 듯한 냄새가 공기를 지배하는 그 순간에 불안이 등뼈를 찬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심장이 갈증으로 불꽃을 피웠습니다

 

  죽음의 다른 이름인 마왕이 내 영혼을 보고 웃는 날처럼 세찬 바람이 불었습니다. 단풍잎들은 사력을 다해 붙잡았던 나뭇가지를 놓고 검은 대지로 떨어졌습니다. 온 몸에서 바닷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기운이 사라졌습니다.

 

  죽음의 다른 이름인 마왕이 호랑이의 불타는 눈을 하자 전생의 기억들이 깨어나 아수라의 얼굴을 했습니다. 단풍나무는 변신하는 여우의 몸처럼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검불에서 단풍나무로 날아오르는 박새 떼들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웹진 『시인광장』 2009년 봄호

 

 


 

김백겸 시인

1953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비를 주제로한 서정별곡』『가슴에 앉힌 산 하나』『북소리』『비밀 방』『비밀정원』등이 있음. 현재 ‘시힘’,‘화요문학’  동인이며 웹진 『시인광장』主幹. 한국작가회의 대전.충남회장, 한국시인협회회원이기도 하며 한국원자력연구원 근무. 대전시인협회상, 충남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