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박재삼 시인 / 허무(虛無)의 큰 괄호 안에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4.

박재삼 시인 / 허무(虛無)의 큰 괄호 안에서

 

 

꽃이나 잎은

아무리 아름답게 피어도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은 지고 만다.

 

그런대도 그 멸망(滅亡)을 알면서

연방 피어서는

야단으로 아우성을 지른다.

 

다시 보면 한정(限定)이 있기에

더 안스럽고

더 가녀린 것인데, 그러나

위태롭게, 아프게, 이 세상에

끝없이 충만(充滿)해 있는 놀라움이여.

 

아, 사람도 그 영광(榮光)이

물거품같은 것인데도 잠시

허무(虛無)의 큰 괄호 안에서 빛날 뿐이다.

 

찬란한 미지수, 오상사, 1986

 

 


 

 

박재삼 시인 / 허무를 향해

 

 

제주 성산포에 처음으로

쫓겨오듯 와서

어쩔꺼나

화산 분화구 같은 곳에 빨려들 듯하면서

햇빛 속에 세상은 이리 허전하고

밑도 끝도 없이 묻히고 싶구나.

 

멀리 바다에서는

바람과 함께

하얀 파도가

연방 밀려와서는

천 년 전에도 했을

지겨운 반복을 귀찮지도 않는지

허무를 향해 부지런히 하고 있고

아, 가까이 유채꽃은

눈이 모자라게 흐드러지게 피어

이승의 마지막처럼 눈부신데

사람은 한번

지독하게 사랑을 한들

반드시 끝장이 있는 사실을

곰곰이 새로 느끼며

파도의 영원을 멍청히 보고 앉았네.

 

사랑이여, 실천문학사, 1987

 

 


 

 

박재삼 시인 / 화상보(華想譜)

 

 

목이 휘인 채 꽃진 꽃대같이 조용히 춘향(春香)이는 잠이 들었다. 칼 위에는 눈물방울이 어룽져 꽃이파리의 겹쳐진 그것으로 보였다. 그렇다, 그것은 달밤일수록 영롱한 것이 오히려 아픈, 꽃이파리, 꽃이파리, 꽃이파리들이 되어 떨고 있었다.

 

참말이다, 춘향(春香)이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생각해 보아라. 원(願)이라면, 꿈 속엔 훌륭한 꽃동산이 온전히 제 것이 되었을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꾸는 슬기 다음에는 마치 저 하늘의 달에나 비길 것인가, 한결같이 그 둘레를 거닐어 제자리 돌아오는 일이나 맘대로 하였을 그것이다. 아니라면 그 많은 새벽마다를 사람치고 그렇게 같은 때를 잠깰 수는 도무지 없는 일이란 말이다.

 

      ― `춘향(春香)이 마음'초(抄)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흥부 부부상(夫婦像)

 

 

흥부 부부(夫婦)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前)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金)이 문제리,

황금(黃金)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소리도

있는듯이 들어내고

손발 닳은 처지(處地)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面)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面)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本)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朴在森. 1933년-1997년) 시인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1996 제4회 한국공간시인상 심사위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