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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란 시인 / 흔적을 지우다
갯벌에서 붉은 가면 쓴 해를 배경으로 사진 찍어 준다고 하자 그가 투덜거렸다, 현상도 안 할 거 뭐 할라고 찍어
인화하지 않아도 좋은 순간들을 알고 있다 그 순간을 지우고 있는 이 세상의 시간을 목격하곤 한다 시간은 거미줄처럼 같은 자리에서 흔들거려 돌에 맞기도 하고 새 부리에 낚여 공중에서 끊어지기도 한다
아낙들은 개펄에서 백합을 지우고 낙지를 지운다 발자국을 지우며 걷는 사람들 뒤로 바다 한 장면이 지워진다
복면을 버리고 해가 사라져도 기억의 인자는 어두워지지 않고 파도 소리는 새하얗게 청각을 지운다
흔적을 지우기 위해 기록한다고 일기장에 적은 후 일상은 신성한 쓰레기통이 되어가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09년 봄호 발표
이정란 시인 / 그림자의 베개
애초에 교량 그림자는 그이 몸 전체를 온전히 베고 잠든 게 분명하다 그리곤 얼마쯤 지난 것이다 그림자는 그이 하반신을 걷어차고 허리 윗부분에 걸쳐 자고 있었다 산책 코스를 돌고 다시 왔을 때 그림자는 잠꼬대하듯 그이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여름 삼복더위 때였다 이제 그림자도 자기 거처로 돌아가 버렸으니 그이도 그만 몸을 일으켰으면 좋으련만, 햇빛이 맘놓고 베고 누웠으니, 원 한강을 향해 흐르는 개천물이 안타까워 돌아보다 교량 다리에 부딪쳐 이마 깨지는 소리가 엔간히 시끄러운데도
그 다음엔 달그림자가 걸터앉았을까……
웹진 『시인광장』 2009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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