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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란 시인 / 흔적을 지우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3.

이정란 시인 / 흔적을 지우다

 

 

  갯벌에서 붉은 가면 쓴 해를 배경으로 사진 찍어 준다고 하자

  그가 투덜거렸다, 현상도 안 할 거 뭐 할라고 찍어

 

  인화하지 않아도 좋은 순간들을 알고 있다

  그 순간을 지우고 있는 이 세상의

  시간을 목격하곤 한다 시간은

  거미줄처럼 같은 자리에서 흔들거려

  돌에 맞기도 하고 새 부리에 낚여 공중에서 끊어지기도 한다

 

  아낙들은 개펄에서 백합을 지우고 낙지를 지운다

  발자국을 지우며 걷는 사람들 뒤로

  바다 한 장면이 지워진다

 

  복면을 버리고 해가 사라져도

  기억의 인자는 어두워지지 않고

  파도 소리는 새하얗게 청각을 지운다

 

  흔적을 지우기 위해 기록한다고 일기장에 적은 후

  일상은 신성한 쓰레기통이 되어가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09년 봄호 발표

 

 


 

 

이정란 시인 / 그림자의 베개

 

 

  애초에 교량 그림자는 그이 몸 전체를 온전히 베고 잠든 게 분명하다

  그리곤 얼마쯤 지난 것이다

  그림자는 그이 하반신을 걷어차고 허리 윗부분에 걸쳐 자고 있었다

  산책 코스를 돌고 다시 왔을 때

  그림자는 잠꼬대하듯 그이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여름 삼복더위 때였다

  이제 그림자도 자기 거처로 돌아가 버렸으니

  그이도 그만 몸을 일으켰으면 좋으련만,

  햇빛이 맘놓고 베고 누웠으니, 원

  한강을 향해 흐르는 개천물이 안타까워 돌아보다

  교량 다리에 부딪쳐 이마 깨지는 소리가 엔간히 시끄러운데도

 

  그 다음엔 달그림자가 걸터앉았을까……

 

웹진 『시인광장』 2009년 봄호 발표

 

 


 

이정란 시인

1959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99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둠ㆍ흑맥주가 있는 카페』( 들꽃, 2001)와 『나무의 기억력』(종려나무, 2007)가 있다. 현재 중앙대 예술대학원에 재학중에 있고 , 계간 『詩로 여는 세상』 편집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