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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일환 시인 / 날아라, 닭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3.

박일환 시인 / 날아라, 닭

 

 

  누가 냅다 걷어찰 때만

  푸드득 날갯짓 시늉을 하는

  저 닭들을 보면 알 수 있지

  진화는 퇴행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걸  

 

  하여 바람을 피운다고

  닭날개를 먹지 못하게 하는 속신(俗信) 따위

  믿을 바가 못 되지만

  날아라, 닭

  날아라, 닭

  정작 날아볼 꿈조차 꾸지 않는 자들이

  애꿎은 가금(家禽)만 놀려대는 가학성에 대해

  나는 오늘 슬퍼지는 것인가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어서

  화석처럼 때로는 몽고반점처럼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법인데

  저 닭들은 지금

  기억은 하고 있는 걸까

  그 옛날 화려했던 시절을 꿈속에서나마

  만나고는 있는 걸까  

 

  생각하면

  우리 모두 빛나던 한 시절이 있었거니

  푸르른 청춘의 날들은 가고

  퇴행성관절염이나 걱정하는

  무리들에 섞여 바쁘게 흘러가다

  날아라, 닭

  날아라, 닭

  우리들 또한 누군가에게 냅다 걷어차인다면

  그제서야 소스라칠 것인가

 

  지상의 삶은 여전히 소란하고

  날갯죽지 가려운 날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웹진 『시인광장』 2009년 봄호 발표

 

 


 

 

박일환 시인 / 새 눈

 

 

  이른 봄비 그치고

  가지마다 작은 빗방울들

  옹기종기 매달려 있는데

 

  차마 떨어져 내릴세라

  나뭇가지들

  내민 팔 함부로 흔들지도 못하는데

 

  끌어안고 기댄 자리마다

  병아리 부리 같고

  아기 입술 같은

  새 눈이 머잖아 돋아나리니

 

  철모르는 아이처럼

  봄은 기어이 오겠구나

  방긋 웃으며 오겠구나

 

  지난겨울 생각에

  나는 자꾸만

  눈물부터 글썽거리는데……

  어린 것들만 보면 안쓰러운데……

 

웹진 『시인광장』 2009년 봄호 발표

 

 


 

박일환 시인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의 추천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푸른 삼각뿔』과 해설집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용악』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