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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현서 시인 / 누가 아서를 키울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3.

김현서 시인 / 누가 아서를 키울까

 

 

  아서, 작은 새를 잡으면 안 된다.

  아서, 비누는 욕실에 두고 단추는 목까지 채워라.

  아서, 레이스가 또 떨어졌잖니?

  아서, 배가 고파도 개미는 집어먹는 게 아니란다.

 

  엄마는 날마다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신발에 묻어온 진흙길을 털어주었다.

  어깨 위의 자작나무도 털어주었다.

  거미줄도 털어주었다.

 

  아서, 물고기는 너와 잘 수 없어.

  아서, 차라리 제라늄을 심자.

 

  엄마는 나의 다른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나도 새도 나무도

  고양이 이름 같은 그 이름을 그만 듣고 싶었지만

  엄마는 꿈속에서도 아서라 불렀다.

 

  아서, 왜 대답은 않고 울기만 하니?

  아서, 숙제는 다 했니?

  아서, 일기는 저녁 먹고 꼭 써야 돼!

 

  나는 잔뜩 조여진 턱받이를 두르고

  저녁을 먹었다.

  숟가락으로 한 살 두 살 세 살

  다소곳이 떠먹었다 그렇게 서른두 숟갈

 

  더 이상 아무도 나를 아서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을 때

  내 딸이 아서가 되어 있었다.

  딸의 꿈속에 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웹진 『시인광장』 2009년 봄호 발표

 

 


 

 

김현서 시인 / 그 자와 이 자

 

 

  그 자와 이 자는 몇 세기에 걸쳐

  같은 노래를 불렀다

  시간은 방금 꺼낸 군고구마

  사랑은 구멍 난 종이봉지

  손을 대면 화르르 타오르는 장작불 속의 공포

 

  그 자와 이 자는 몇 세기를 걸쳐

  서로를 부정하다 손을 잡았다

  그 자와 이 자는 실패를 반복했고

  그 때마다 직업과 주소를 바꾸고

  몸의 길이를 바꿨다

  윤기 잃은 털로 치장을 하고

  그 자와 이 자는 누군가 흘려보낸

  마른 강물소리를 들으며 건기를 보냈다

 

  그 자와 이 자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몇 세기를 걸쳐 전등을 켰다 껐다

  새로운 눈을 찾았다

  저녁이 오기 전에 식탁을 차려놓고

  그 자가 예치한 저 자를 복제해서

  새로운 이 자를 내게 덧붙여 주었다

 

  이 자는 내게 노래하는 아침을 주었다

  나는 노래하는 아침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액자에 끼워 넣었다

  오븐에 넣었다

  건조대에 널었다

  신발장에 넣었다

  창문에 붙였다

 

  몇 세기가 흘렀지만 나는

  그 자와 이 자와 저 자로

  동시에 살아갈 다른 얼굴을 찾지 못했다

 

웹진 『시인광장』 2009년 봄호 발표

 

 


 

김현서 시인

1968년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현대시사상》 시 당선, 2005년 <아동문예문학상> 동시 당선,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시와 동시를 쓰며 작품활동. 시집으로 『코르셋을 입은 거울』(천년의시작, 2006)이 있음.